광고
광고
광고

갈등과 통합의 리더십

합리적 해결책 묻는 진리파지의 정신 절실

안창도 | 기사입력 2004/10/09 [10:16]

갈등과 통합의 리더십

합리적 해결책 묻는 진리파지의 정신 절실

안창도 | 입력 : 2004/10/09 [10:16]

[오피니언] 동서고금을 통해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대가 얼마나 되었던가? 우리 역사를 보면 통일신라 시대가 그럴만한 때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들도 왜구에 시달리고 또한 당나라와 발해와의 외교전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는 역사서를 통해 보면 알 수 있다. 근현대사를 살펴 보아도 우리 한반도에만도 청일전쟁과 일제 침략, 한국전쟁 등등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들은 한두번의 큰 전쟁을 겪어야 했다.
 
 어찌보면 국가라는 존재도 민족간의 갈등의 소산인 전쟁에서 내부의 힘을 최대한 결집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파생물인지도 모르겠다. 성경의 구약시대를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12지파에 의한 부족연합체로 잘 지내오다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자 하나님께 왕을 세워 달라고 탄원을 하였다. 그리하여 세운 왕이 사울이었다.


 국가와 국가간의 갈등을 물리적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한국가 안에도 또한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집단들이 있어서 이의 충돌이 또한 내란으로 이어지고 굳이 전쟁은 안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투쟁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구성원이 공생하기 위해선 갈등을 줄이고 긴장관계를 갖는 사람들끼리 통합을 위한 기제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타인이나 타민족과 갈등 관계를 갖는 것은 결국 하나되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그래서 통합이나 평화의 심성을 키우기 위해선 평화교육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교육은 단순히 개념교육보다는 체험학습이 더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굳이 갈등의 현장인 이라크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지 않더라도 ‘나와 너’ 사이에 수많은 갈등관계를 갖는 우리로선 일상이 바로 평화교육의 현장이라고 할만하다.


 경제, 문화, 종교 등의 갈등으로 인해 전쟁으로 여일이 없는 지구를 위해 평화운동을 벌이는 집단으로 퀘이커 교도들이 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 당시에 가장 격렬하게 종교적 자유를 위해 행동했던 이들은 그 이후에 평화를 위한 세계적 활동을 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영국의 브레포드 대학의 평화학과도 우드부룩이란 퀘이커평화학교의 지원하에 설치되었다. 학과의 운영자금과 우드부룩에 있던 평화자료를 대학에 기증했다고 한다.


 흔히 갈등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더욱 빈번하게 유발하게 된다. 오사마 빈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뉴욕의 무역센터까지 자살특공대를 공수한 것도 결국 구소련 체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부시 전 대통령(현 부시 대통령의 부친, 영화 ‘화씨 911’을 보라)의 지원을 받았던 이웃관계에서 연유한다. 독립 후에 우호관계가 깨지면서 그리한 것이다. 결국 이웃관계가 엄청난 재앙을 불러 온 것이다. 그런 경우는 세계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항상 인접국가가 서로간의 원수가 되어 왔다. 프랑스와 독일과 영국이 그러했고 한국의 이웃들인 중국과 일본이 그러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2000년전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절절한 것인가?


 이번 추석에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간의 교류를 끊은 채 홀로 지낸다고 했다. 50억원에 달하는 문중 땅을 큰댁에서 형제들과 상의 한마디 없이 처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돈과 관련해서 서로 간에 상처를 받고 의절하는 집안이 많다고 한다. 무엇인가? 굶는 집안은 상당히 줄었다는데 추석 제사상에 둘러 앉은 가족의 수는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가족’이 통합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지점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추석 극장가에는 유달리 ‘가족’과 관련한 한국영화들이 많이 상영되는 가보다. 가족만이 아니라 집단과 지역사회에도 갈등이 상존한다. 우리 하남시에도 여러 집단 간의 갈등이 존재하고 있다.


 갈등과 통합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문민정부 시대부터일 것이다. 그 이전인 군사정권 시절엔 갈등이란 말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갈등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으로 여겨 일차적으로 표면화되는 것 자체를 억눌렀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각 집단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몫 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이를 조정해야 할 정치권조차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불평이 많이 터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중요한 공약이자 국정 지표로 내세운 분권화로 인해 오히려 사회적 갈등이 더 증폭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집단간의 갈등이 사회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그 사회가 적어도 열린사회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갈등을 억제하기 보다는 사회통합을 위해선 갈등을 조정하는 능력이 시민사회에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국가간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선 갈등통합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리더십이라고 하겠다.


 불행하게도 우리 시민사회 리더십들이 갖고 있는 갈등 조정능력은 현재로선 낮아 보인다. 국가 전체를 보아도 그리하고 그러한 국가와 연계되면서 상호작용을 하며 끊임없이 갈등의 소스를 제공하는 지방자치 현장도 그러하다. 국가보안법, 행정수도이전과 같은 큰사안은 물론이고 분당주민과 용인죽전주민간의 도로연결문제 등과 같은 지역 사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갈등에 당면한다.


 어쩌면 오늘날 사회적 갈등은 ‘비트’ 시대의 한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디지털은 10진법이 아니라 2진법이다. 무수한 ‘예’, ‘아니오’로 정보가 집적되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은 우리에게 ‘예’ ‘아니오’를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학교에선 철학시간에 ‘선택’과 관련한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는 것인지 모른다.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을 겪어 나가야 하는 것임을 프랑스 철학자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아니 삶 자체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선택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변증법적인 정반합으로서 부정에 대한 부정으로서 긍정이 있을지언정 제1(테제)이나 제2(반테제)가 아닌 제3의 길은 언제나 우유부단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도외시되는 것이다. 어느 집단이나 강경파가 득세를 하는 이유가 이런 연유에서일것이다. 이처럼 진리를 향한 길은 여러 갈래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순간적인 판단은 항상 ‘예, 아니오’일 경우가 다반사이다. 우리네 판단 앞에는 밥을 먹든지 안먹든지 하는 것만 있지, 밥을 먹으면서 안먹는 순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이 개인에겐 선택의 기준이나 원칙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파장이 미칠 땐  도덕이나 윤리로 불리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변수로 가득찬 삶 자체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지 판단 기준이 없이 그때그때마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개인에겐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과부하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개인은 스스로를 또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 선택의 과정이 주는 심리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 개인 혹은 집단들이 도그마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삶의 다양한 순간들을 굳어진 전제들로써 일거에 판단해 버리려고 드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하기 위한 심리적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개인들로선 자유와 상상력같은 개인의 가치이자 생명력이 막히게 되어 종국에는 공동체가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가 주도하는 나치정권을 허용하게 된 것도 1차대전 이후 황폐화된 독일사회의 불안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중산층들이 ‘선택’이라는 심리적 과부하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선택의 과부하’를 이겨내지 못하고 집단히스테리를 일으키게 된 그들에게 나치스와 같은 교조주의, 독재는 개인들의 사회적 불안감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기제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결국 사회적 통합을 말할 때 개인과 공동체를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현대과학에서는 홀로그램의 이미지를 통해 우주를 연구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즉 티끌 안에 전체 우주의 심상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불교의 화엄사상이 그러했고 동학의 인내천 사상이 그러한 홀로그램 이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선 바울이 ‘내 안에 주님이 거하고 주님 안에는 내가 있다’라는 말로 그에 대한 통찰을 보여 주였다고 할 것이다. 유한한 인간 존재 안에 무한한 신적인 본질이 거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우리 마음이 곧 우주인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개인의 의식이 확대되어 공동체의식을 형성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역도 그렇다. 어느 글에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인사말 중에 ‘미타쿠테오야신’이란 말이 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모든 건 하나로 연결돼 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의식은 개인의식이라는 독자적 공간의식에 의해 타인과 분리되어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개인의식을 느낄 수 있는 공간감각은 자기가 발딛고 서는 한평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적대감이 있는 사람이 그 공간 안으로 들어서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미타쿠테오야신’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어떡하든지 우리 사이의 적대감을 해소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개인과 개인, 혹은 우주적 존재인 하나님과 인간과의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인류에겐 거대한 코드(*code)이자 상징이다. 그러나 그 상징이 의미를 갖는 정보체계로 우리의 삶과 존재를 규정해 들어올 때 우리는 결단의 시간을 맞이한다. 흔히 이것을 기독교에선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한다. 무의미하게 단선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의미를 갖는 계시의 시간이자 결단의 시간이며 실존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은 우리에게 종말론적인 시간이다. 선택의 시간이자 심판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종말론적인 시간을 매일 매일 살게 되면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겐 ‘성령’이 충만한 시간을 사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시간들은 우주의 절대지로 가득찬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야말로 개인이 자기의 폐쇄적 공간성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연대로 확장되고 네트워킹되는 시간이 된다. 그때가 대화의 시간이고 경청의 시간이다. 나를 앞세우기 전에 타인의 처지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우리 서로를 위해 가장 좋은 방책이 무엇인가를  의논하는 시간이 된다. 이럴 때 일방적인 주장이나 주관적 견해는 진리일 수가 없다.


 대화와 협상의 자리에는 적어도 현시점에서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 무엇이냐를 묻는 즉 진리파지(*사티아그라하)의 정신이 필요하다. 그런 힘이 없을 때는 절충이나 어정쩡한 양보로 대충 넘어가게 되고 그것이 오히려 나중에 더 큰 문제를 야기하여 합의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너와 나’를 뛰어넘는 우리‘의 자리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진리‘의 자리이다. 개인과 공동체, 개인과 개인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이 공존하며 상생하는 자리 그곳이 바로 진리의 자리이며 사회적 각성(깨달음)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각개인은 그 진리를 깨닫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련이며 공부(工夫-kung fu)이다. 공동체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각개인의 진리를 향한 열정과 각고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니 적어도 그런 마음의 자세를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타인의 말에서 진리를 발견할 때 자기의 주장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사회적 자원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하는 것은 갈등 통합에 대한 인프라가 구축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갈등과 통합’은 단지 하나의 커리큘럼일 수가 없다. 먼저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개인이나 집단의 집착과 욕망에 대한 깊은 이해와 분석이 없이 갈등을 조정하려 들다가는 오히려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조잡한 합의만을 도출하기 십상이다. 즉 미래지향적이고 갈등 당사자는 물론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이롭게 작용하는 합의가 아니라 어느 일방에게 유리하게 되거나 사회발전에 역행하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경우가 무수히 발생하게 된다. 이제 우리 시민사회 안에서 갈등의 통합을 위한 새로운 노력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을 나는 시민사회내에 새로운 리더십 배양이라고 본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섬김의 리더십’이자 ‘십자가의 도’요, 유교적으로 보면 ‘군자’를 시민사회에 많이 배출하는 것이다.


 웰빙(well-being)은 단순한 물질적, 육체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풍요로움까지를 말한다. 모두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부족함이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런 사회적 합의를 우리 스스로 전제해 놓지 않고서는 항상 모자람의 심리상태에 머물게 되고 남보다 더 갖기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공동체적 삶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어 내야 한다. 도그마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태 속에서 진리의 선택과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이하는 자세를 갖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갈등을 통합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이웃으로 인해 갈등하며 아파하는 개인에게 하나의 도전이며 상징적 코드(code)인 것이다.


 *코드(code) : 컴퓨터에서 특정한 문자를 표현하는 비트열. 부호라고도 한다. 통신에서 데이터를 전송·압축·암호화할 필요가 있을 때, 수치·문자·기호계열로 된 원래의 데이터를 다른 기호계열로 변환하고, 수신측에서는 다시 원래 계열로 되돌리는 작업이 수행된다.


 *사티아그라하: 인도의 간디가 주창한 3대 도덕각성운동 중에 하나를 이루는 주요개념. 진리파지 혹은 진리파악이라고 한다. 그는 ‘진리가 신(紳)이다’라고 할 정도로 진리만을 추구하고 그에 기반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신을 절대지(絶對知)로 간주한 그는 “나는 신 이외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기자


 - 안창도님은  하남시 ymca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 ... 본 기사는  성남일보와 시티뉴스(www.ctnews.com)와의 뉴스협약에 의한 기사입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