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친일반민족 진상규명은
제2의 반민특위”

인터넷 야전사령관에서 반민족진상위 지휘자로 변신하는 정운현

이창은 | 기사입력 2005/04/13 [21:24]

“친일반민족 진상규명은
제2의 반민특위”

인터넷 야전사령관에서 반민족진상위 지휘자로 변신하는 정운현

이창은 | 입력 : 2005/04/13 [21:24]
[인터뷰] 대한민국 인터넷언론의 절대강자, <오마이뉴스>의 야전사령관 정운현 국장이 물러났다.

정 국장은 지난 8일 퇴임식을 갖고 편집위원으로 물러났지만, 이는 새로 발족할 ‘일제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로 약칭)로 자리를 옮기기 위한 수순으로 알려졌다.
 
정 국장은 자리를 옮기는 것에 대해 “아직 통보받지 못했다”며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친일문제 청산과 인터넷언론의 역할을 화제로 삼아 얘기가 길어지면서 자신의 입장을 조금씩 드러냈다.
 
특히 그는 ‘옮기게 된다면’이라는 단서를 통해 진상규명위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3년 3월 간 재직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시절의 소회를 통해 인터넷언론의 역할과 전망에 관해 담담히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본 인터뷰는 지난 10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2시간에 걸쳐 대화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대자보(이하 대) : 오마이뉴스를 퇴임하고 ‘일제한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로 자리를 옮긴다고 들었다. 축하를 드려야 하는 것인지 위로를 해야 하는 것인지...
정운현(이하 정) : 아직 정식으로 통보받거나 공표된 것이 아니라 뭐라 말할 수 없다. 인사에 관련된 일이라 내 입으로 먼저 말할 수 없다. 임명권자에게도 누가 되는 일이고, 민감한 사안이라 함부로 언급할 수 없다.
 
대 :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직은 지난 8일 공식적으로 사임하고 편집위원으로 옮기지 않았나? 현재 오마이뉴스는 영향력 면에서나 내용면에서 절정을 달리고 있다고 보는데 자리를 옮기는 이유는?
정 : 이번에 발족하는 진상규명위는 사실상 제2의 반민특위로 50여 년 만에 부활하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기구이기 때문에 그동안 연구한 친일문제의 완성 겸 나름대로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싶다. 
 
대 : 옮기게 되면 담당할 역할은?
정 : 진상규명위의 가장 큰 임무는 ‘진상조사, 연구분석’이다. 진상규명위에서 내가 일하게 된다면 사무처장으로 위원회의 조사연구업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사무실에 틀어박혀 빛도 안나는 일이다. 
 
대 : 정 국장을 아는 네티즌들이나 지인들은 기대반 우려반일텐데...
정 : 아직 통보나 내정사실을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답하기가 조심스럽다. 내 거취문제와 관련해서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지인들이 메일 등으로 가게 되면 잘 해 달라는 소식은 보내오고 있다. 
 
대 : 그렇다면 영전이 아닌 좌천인가(웃음)?
정 : 나는 오마이뉴스로 자리를 옮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언론사 간 영향력 6위로 중견 언론사이지만, 옮길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성장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음지’만 찾아다니지 않았나 싶다. 이른바 메이저라는 <중앙일보>에서 98년 8월 <대한매일신보>(지금은 서울신문)로 옮긴 것이나, 지난 2002년 1월 대한매일에서 인터넷매체 오마이뉴스로 옮길 때도 그렇고 큰데서 작은 곳으로 옮겼다.
 
대 : 중앙일보에서 대한매일신보로는 어떻게 옮기게 됐나?
정 : 뭐 지나간 일인데... 중앙일보에서 [실록 박정희] 연재를 마치고 나서 친일파에 관해 연재를 기획하게 됐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마침 친일파 전문가인 김삼웅 교수(현 독립기념관 관장)가 대한매일 주필로 옮기면서, 친일파 연재를 주선해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대한매일에 연재한 친일파 연재기사는 국내 언론사상 장기기획으로 지금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대 : 메이저라는 중앙일보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매체인 대한매일로 옮기게 되면 대우 등에서 불이익이 많았을텐데...
정 : 불이익이 문제가 아니라 기자로서 써야 할 기사를 못쓴다는 것은 존재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본사와 인터뷰중인 정운현 국장     ©대자보
대 : 정 국장은 기자라기 보다는 친일문제전문가로 더 알려져 있고, 저서도 여러권 냈다.  친일문제 전문가가 된 배경이나 계기가 궁금하다.
정 : 1984년에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한 때만 해도 을사오적에 대해 아는 정도였고, 친일파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다. 88년 여름쯤에 한 잡지에서 친일문제 전문가인 임종국 선생의 와이드기사를 보고 아 이런 사람이 있구나하고 알게됐고 친일문제가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이뤄진 사실도 알았다. 특히 우리가 민족진영에서 활동한 것으로 아는 이들 중에도 일제말기에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들이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대학교육을 받았지만 육당 최남선 등이 친일파로 변절한 사실은 가르치지 않았다. 진짜인지 의구심이 나서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충격적이었다. 왜 학교와 교과서에서는 가르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그러다 89년 10월에 임종국 선생을 찾아뵐려고 하는 중에 부음을 접했다. 그 후 1년이 지난 후에 임 선생의 1주기에 세상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언론에 관심이나 주목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 김삼웅선생을 알게 됐고 "우리가 뭔가 해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친일파, 그 인간과 논리>라는 책이 그런 과정을 통해 나왔다. 그 안에 원고지 100매 정도 분량으로 임 선생에 소개 겸 평전을 직접 썼다.

책 출간 후 언론이 이를 주목했고 한겨레신문 등에 임 선생의 뒤를 이을 후학으로 소개됐다. 이후 3.1절이나 8.15에 신문사들이 기획을 할 때 임 선생이 돌아가신 후 부탁할 곳이 없어서인지 나에게 문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중앙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글을 써주거나 기획을 해주는 일에 떠밀리게 됐다. 초창기엔 임 선생 연구에 토를 다는 정도였고, 이후 15년 간 친일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다.
 
대 : 일간지 기자로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맡게 됐다. 특별한 자신감이나 매체에 대한 이해가 있었나?
정 : 2001년 오마이뉴스로 옮길 때 규모나 운영 면에서 아직 태동하는 작은 매체였다. 왜 가느냐고 주위에서 물었는데 성장가능성을 보고 왔다(웃음). 사실 예지력이 있었다기 보다는 자유로운 글쓰기에 끌렸다.
 
대 : 오마이뉴스로 옮긴 계기는?
정 : 2001년 여름, 대한매일에 근무하고 있을 때 오연호 대표가 제안을 했다. 나는 인터넷매체 편집장으로는 나이가 많다고 고사했다. 참고로 나는 아직도 독수리타법이다. (웃음)

연말에 다시 오대표가 찾아와 "편집과 경영을 함께 맡기 힘든 상황"이라며 다시 제안을 했다. 다시 나이가 많다는 점을 이야기하자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며 다시 부탁했다.

자유로운 글 쓰기와 개혁성에 마음이 들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자 "당신이라면 잘할 것"이라고 해서 옮겼다.
 
대 : 기자에서 곧바로 편집국장이 됐다. 인터넷 매체 편집국장의 덕목은?
정 : 인터넷언론은 방향과 감각이다. 예를 들면 2002년 여름에 차세대전투기 선택을 놓고 미국 보잉사의 전투기가 도입되는 것에 반대의견이 많았다. 이때 배칠수의 엽기 김대중이라는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기자들이 이를 듣고 웃고 즐기기만 한 상태에서 이를 기사화 했다. 내가 판단하기엔 인터넷상에서 재미있고 보편적인 감성이면 기사화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현직대통령이 욕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는 점이었는데 기사화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종이신문과 방송까지 다른 매체들이 이 보도를 우리가 한 후에 다 보도했다. 뒤늦게라도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마인드의 차이다. 인터넷언론은 도덕적 해이가 아닌 기성매체보다 좀 더 열린생각이 필요하다.
 
인터넷마인드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포토샵은 아직도 안 배웠다. 내가 포토샵까지 하면 우리 편집기자들이 할 일이 없다.(웃음)
 
기술적인 것은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습득도 가능하다. 개혁적인 열린사고, 새로운 창조적 파괴의 마인드가 형성돼야 한다. 편집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데 종종 후배들에게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대 : 이제는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오마이뉴스가 성공을 한 요인은 무엇인가?
정 : 기본적으로 사회의 민주화가 토대가 됐다.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박정희, 전두환 때라면 무서워서 댓글을 못 달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신문의 전형을 보이며 앞서간 것도 발전을 이끈 원동력이 됐다. 기사에 바로 반응을 올릴 수 있는 댓글, 현장중계, 열린인터뷰 등 새로운 포맷을 개발했다.

특히 시민기자제도는 독자확보와 다양한 기사생성에 도움이 된 윈윈(win-win)이었다. 그런 토대에다 대통령선거 등 정치적 이슈가 이벤트가 됐다. 사회적 호기를 맞아 성장에 결정적 키를 잡은 것이다.
 
대 :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인터넷뉴스인 오마이뉴스의 편집방향에 특징이 있다면 어떤 점이었는지?
정 : 적은 인원으로 늘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다행히 선택해서 집중한 사안들이 대부분 성공했다. 앞서서 의제를 설정하고 그 의제를 널리 확산하며 시민사회가 견인해 준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예를 들면 지난 대선 때 후보경선 생중계와 10만에서 20만 인원이 모여든 촛불집회보도, 탄핵보도 등 의제설정과 확산에 언론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마무리는 안됐지만 국보법페지에 관한 15회장기연재도 타 매체들 보다 앞서서 이끌었다. 이 시대에 남아있는 개혁과제에 대해 과감한 의제설정을 했고, 대부분 사회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친일문제도 거대한 기성매체가 외면을 하는 속에서 사회의제로 확산시켰다.
 
대 : 오마이뉴스가 ‘친여’ 혹은 친노매체라는 비판도 있다.
정 ; 우리에게 그런 친노매체라는 평가는 사안별로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박수와 칭찬을 보냈다. 하지만 파병에 반대했고, 흠이 있는 인사를 공직에 임명하는 것을 비판했다. 부안방폐장과 세만금개발도 반대를 했다. 따지고 보면 참여정부의 주요시책은 거의 반대를 했다. 대미저자세외교도 반대했다.

오히려 조중동은 그런 면에서 철저한 친노매체 역할을 했다. 거기에 대해 비판을 한다면 할 말은 없다. 오마이뉴스의 정체성과 방향성으로 볼 때 개혁, 진보적 정책은 찬성을 했고 반역사적인 정책에 반대했다.
 
특정 정권이나 정부를 지지한 것이 아니다. 그런 오마이뉴스를 친노로만 보는 건 부담이 된다. 그리고 친노, 반노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동의할 것은 동의하고 반대할 것은 반대하는 방식으로 각 매체의 색깔을 나타내는 것이다. 흑백논리처럼 친노와 반노로 구분하는 것은 졸렬하다.
 










▲ 오마이뉴스의 정운현 국장     ©대자보
대 : 기억에 남는 특종이나 가장 보람된 기사를 평가한다면?

정 : 첫째로 여중생들의 사망에 항의하는 촛불집회가 기억에 남는다. ‘앙마’라는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시작해 우리나라 시위문화를 바꾼 계기가 됐다. 이후 탄핵, 파병, 새만금 등 시위주제에 관계없이 촛불집회라는 평화적 형태의 집회가 자리잡았다. 시위문화의 변화를 우리가 견인했다고 본다.

둘째로 2004년 1월,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비용이 취소되자 11일만에 친일인명사전 편찬비용 5억원을 모금한 점이다. 모금당시 사회, 역사적인 배경도 있으나 인터넷에서 11일간에 5억이 모인 것은 모금운동사에 남을 일이다. 이를 계기로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의지가 모이고 역사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고 본다. 오마이뉴스도 매체로 의미 있는 위치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작년 여름 그리스에서 열린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 취재도 기억에 남는다. 오마이뉴스가 1300만원의 비용을 들여서 2명의 취재기자를 현지에 파견했다. 우리사회의 장애인 체육문제와 관련, 시책에 개선을 가져왔고 언론도 이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기획에 큰 보람을 느꼈다.
 
대 : 앞으로 언론계 판도변화에 대한 생각은?
정 : 전제할 것이 나는 언론비평가나 전문가는 아니라는 점이다. 종사자 중 한 사람으로 드물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두루 경험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하겠다.

주요신문이 가판을 이미 없앴다. 90년대 후반 신문과 방송이라는 잡지에 내가 가판의 폐지를 주장하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이미 신문은 스스로 그 영향력을 없앤 것이다. 무료지들로 인해 신문판매대에서도 힘이 급격히 약해졌다. 아침에는 무료지에 밀리고 낮에는 인터넷에 밀린다. 방송에 밀려 저녁에도 힘이 없다. 종이신문이 독자의 눈을 잡아둘 힘이 없다.
 
조중동 중 한 신문사가 전면무가지로 승부할 계획까지 세웠었다고 한다. 국내 신문은 몇 년 후 모두 무가지화 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짧으면 5년 이내에 그런 변화가 올 것이다. 신문은 찍을수록 손해가 나는 상황이다. 경품 등 판매전략도 더 이상 쓸 수가 없어 독자가 줄고 이로 인해 영향력이 줄어든다. 이에 따라 광고도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살아날 길은 인터넷판을 강화하고 종이판은 적정한 부수로 발행하며, 인터넷에 담지 못하는 훌륭한 레이아웃과 단정한 해설기사로 승부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선호도가 썩 높지 않은 것이 해설과 기획기사다. 심층적인 해설기사와 탄탄한 연재물(기사)로 승부를 걸어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
 
대 : 우익보수 쪽에서도 인터넷에 많이 진출하고 있다. 인터넷매체의 발전흐름에 대해 짚어 준다면?
정 : 인터넷은 진보다. 오마이뉴스의 성공배경은 열린 진보를 표방한 것이다. 물론 보수성향의 인터넷매체도 실패한다고 보진 않으나 큰 성공은 어렵다고 본다. 왜 인터넷이 진보인가 하면, 기성 보수매체의 반발로 탄생을 했기 때문이다. 기성 신문의 보수적인 제작형태에 불만족한 독자들이 찾아온 것이다. 이런 독자들의 구미에 맞추려면 진보를 표방함이 맞다. 진보는 단순한 급진개혁이 아니라 열린사고와 자유로움이 함께 하는 파괴정신이 필요하다.
 
느슨하면서도 다양한 형태의 연대가 가능해야 더욱 매력적이다. 보수성향을 강조하는 매체는 네티즌들의 자유분방함을 담기에 힘들다. 예를 들어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학자들도 공과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양자를 저울에 올려놓고 다양하게 평가를 하고 있다. 진보매체는 댓글 조차도 모두 수용한다. 그러나 보수매체는 칭송일변도다. 네티즌들은 이런 것을 용인을 안 한다.
 
현재 인터넷신문(매체)는 보수, 진보에서 중도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2~3년 간 우후죽순으로 인터넷신문이 생기는 춘추전국시대로 갈 것이다. 하지만 춘추전국으로 계속 가지는 않고 재정적인 능력이 보장되고 작지만 충성스런 독자층을 가진 인터넷매체는 살아날 것이다.
 
앞으로의 인터넷신문은 종합지보다는 전문지 형태를 지향해야 살아날 것 같다. 경제지는 몇 곳이 이미 완전히 자리를 잡은 상태다. 정치, 경제, 영화 등 대중성과 전문화를 추구해야 네티즌에도 유익하고 매체생존에도 좋을 것이다.
 
대 : 지식인의 현실참여나 정치입문에 대한 생각은?
정 : 독재정권 시절에는 지식인의 현실참여는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다. 정권의 하수인이 되거나 부당한 정권에 이론가로 참여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당성이 결여된 불법적인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현실참여는 꼭 그렇게 볼 것이 아니다. 정부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세워졌고 대통령, 국정원, 검찰을 무서워하지 않는 시대라면 지식과 좋은 식견을 가진 지식인이 사회나 정치의 개혁을 돕는 것이 선으로 본다. 단, 개인적인 영달이나 앞잡이 노릇이 아닌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언론인이 언론개혁을 위해 현실정치인 국회나 청와대로 가서 노력하는 것도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닌 상태에서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배제되기보다는 사회구성원으로 참여를 해야 한다.
 
대 : 2007년 대선에서 인터넷신문이 어떤 역할을 할 것으로 보나?
정 : 2002년 대선은 인터넷신문의 실험기였다. 첫 싹 틔우던 시절에 첫 경기에 선방했다고 본다. 작년 4월 총선도 나름대로 선방했다. 인터넷은 대통령선거에서는 지나치게 인물중심으로 보도를 한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늘 선거 후에 언론에서 나오는 지적이지만 앞으로 인물보다는 정책위주의 보도는 필요하다고 본다.
 
대 : 아무래도 차기 편집국장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이 높다. 어느 곳에서는 여성 편집국장 시대가 열린다고도 하는데 귓띔이라도 해달라.
정 : 이미 오마이뉴스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서 한사람이 나가거나 한사람이 들어오는 것으로 무너지거나 확 바뀌진 않는다. 후임자가 왕성한 기력으로 일해 주면 더욱 도약할 것으로 믿는다.

오연호 대표가 여러 사람을 추천 받기도 하고 만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큰 전제조건은 시민기자제도를 이해하고 개혁적인 성향에 기자로서 감각을 지닌 50여명의 편집국 기자를 이끌 리더십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4월말이나 5월초쯤 1달 이내에 후임자가 결정이 될 것이다. 그 사이는 김병기 부국장이 직무대행을 맡는다.
 
대 : 후배기자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한다면?
정 : 요즘 젊은 기자들은 패기가 부족하다. 기자는 기능인이기도 하지만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사적 측면이 필요하다. 기자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칼을 가지고 있다. 무명인을 유명인으로 바꾸고 유명인을 한 순간에 추락시키기도 한다. 그런 위력을 지닌 만큼 조금만 더 지사적인 기자가 됐으면 한다.
 
대 : 장시간 인터뷰에 감사하며, 자리를 옮기시게 되면 큰 성취를 기원드린다.
정 : 다른 기구도 마찬가지이지만, 일제하 빈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정말 중요하다. 이제 시간이 없다. 올해가 광복60주년인데 ‘친일인명사전’ 조차 제동이 걸린 나라이다. 네티즌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인터뷰 후기] 
 










▲ 정운현 국장의 대표적 연구서의 하나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의 표지     © 개마고원)

정운현 국장은 오마이뉴스를 통해 한국언론의 지형을 바꾼 풍운아이자 야전사령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민완기자라거나 수많은 기자들을 지휘하는 카리스마를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단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조용조용히 얘기하는 그의 스타일은 기자라기 보다는 학자나 선비스타일로 비춰진다. 그런 모습에서 조용한 선비풍의 학자라고 오해하면 그의 진면목을 모르는 것이다.
 
정 국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현직기자로서 누구 보다 언론개혁, 특히 안티조선을 넘어 안티조중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001년 3월 월간 <인물과 사상>을 통해 강준만 교수와 ‘안티조선인가 안티조중동인가’라는 주제로 ’치열한 설전을 나눈 바 있다.
 
정 국장이 네티즌들에게 깊은 각인을 남긴 것은 이른바 ‘한경대’를 제안한 것에 있다. 지금은 kbs 사장으로 있는 정연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에 의해 명명된 ‘조중동’(조선 중앙 동아일보를 지칭) 수구언론 카르텔에 의해 한국언론의 왜곡상을 정확히 지적했다면, 정 국장은 이에 저항하기 위해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의 연대를 제안한 것이다. 현직기자이면서 그의 이같은 언론개혁의 소신은 일간지 기자라는 기득권을 버리면서까지 인터넷매체인 오마이뉴스로 옮기게 된 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상 학자이자 선비이자 지사였다. 지금은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오마이뉴스의 편집국장직을 박차고 나선 것도 친일전문가로서 시대사적 사명을 강하게 인식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인터뷰 서두에 ‘좋은데 가시는 것이 아니냐’는 세속적인 질문에 정 국장의 대답은 오래동안 기자의 귓전을 때렸다.
 
“나는 지금까지 빛 안나는 음지로만 갔다”
 
정운현 편집국장의 멋진 변신을 기대한다.


... 이 기사는 본사와 대자보(jabo.co.kr)간 뉴스협약에 의해 게재한 기사입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