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높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나뭇가지 끝’에 ‘홍시 하나’가 매달려 있다. 날 짐승을 위해 따지 않고 남겨둔 까치밥이다. 자연에서 난 것을 취하지 않고 나누려는 넉넉한 마음이다.
계절 사이에서 만나는 미술관이다. 출렁이는 바람도 조심조심 홍시 하나를 비껴간다. 한그루의 나무에 까치밥을 남긴 역사적 기록은 아무도 모른다. 날짐승을 위하여 까치밥을 남겨두라는 임금의 어명(御名)도 없었다. 따뜻한 우리 국민의 전해오는 마음이다.
방식 독일조경명장은 “감나무는 효를 상징하는 나무다. 감나무의 어머니는 고욤나무다. 감나무는 다섯 색의 검은색, 푸른색, 노란색, 붉은 색, 흰색을 가진 가을의 대표적인 상징의 나무다.
까치밥은 ‘생태의식’을 보여주는 우리 민족정신이다. 우리 조상은 감나무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을 보였다. 홍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흔하게 유통이 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서 상품화 단계에 이르렀다“ 고 한다.
다소 결이 다르지만 까치밥을 연상하는 미국의 단편소설이 있다. 까치밥은 자연 ‘생태의식’이라면 소설은 ‘인간애‘의 모습을 담는다.
오헨리(O.Hennry1862~1910)가 쓴 <마지막 잎새>(1905년 The Last Leaf) 단편소설은 세계 10대 명단편선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헨리 작가는 <마지막 잎새> 하나로 세계 10대 단편소설가중 한사람이 되었다. <마지막 잎새>는 뉴욕 마을에 살고 있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에는 깊은 병에 걸려 오랜 시간 동안 좌절과 고통으로 삶의 의지를 잃은 젊은 화가 존시(Johnsy)와 그녀를 지극정성 보필하는 동료 수(Sue)가 등장한다.
병든 존시가 누운 침대너머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말한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어. 지금은 다섯 잎밖에 남지 않았어. 나는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해. 마지막 잎이 떨어지면 나도 죽을 거야”
윗층에 사는 화가 베어만(Behrman )은 존시의 말을 전해 듣는다. 비바람이 치는 추운 밤에 담장위에 영원이 떨어지지 않는 나뭇잎 하나를 그린다. “존시는 좋은 아이야. 그런 아이가 폐렴으로 죽으면 절대 안되지. 조금만 기다려라”
마침내 그림을 완성한 베어만. 하지만 베어만은 거센 비비람을 맞은 탓에 독감이 심해져 결국 생을 마감한다. 베어만 화가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지키려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베어만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린 걸작품은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한 한사람을 살리는 <마지막 잎새>였다.
확대 해석을 해본다. 우리의 조상이 가을 끝에 남겨두는 하나의 까치밥이 작가, 오헨리에게 시공을 넘어 영감을 준 게 아닐까.
가수 배호는 <마지막 잎새>를 불렀다. 배호를 기억하는 팬들은 호소력 짖은 노래를 이 가을, 가슴으로 감상한다.
1978년에 이영구 감독에 의해 영화와 되기도 했다. <마지막 잎새>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었다.
시인들은 가을 하늘 나뭇가지 끝에 ‘홍시 하나’를 두고 시를 창작한다. 오세영(1942~ )시인은 ‘저울’이라는 시에서 “정원의 나뭇가지 끝에/ 위태위태하기 매달려 있던 홍시 하나가/ 이 아침/ 툭 떨어진다./ 긴장한 수평선 한쪽이 한순간 풀어지며 출렁./ 푸른 물을 쏟아낼 것만 같다.”의 시구가 있다. ‘나뭇가지 끝‘의 까치밥은 사랑의 끝에서 만나는 가을이다.
사람들이 홍시를 까치밥으로 남겨두는 것은 추운겨울에 혹시 까치가 먹을 것이 없을까 봐 걱정의 배려다. 사람들이 까치의 겨울나기를 염려하는 것은 곧 생태의식이다.
생태의식은 사람과 날짐승이 같이 사는 생명의 공동체다. 이 세상에 감나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감나무의 까치밥 탄생을 아는 사람도 없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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