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권 칼럼] 지난 5일 날씨는 흐린 뒤에 쾌청했고 제막식에 뜻 있는 우리 일행 30여 명(대표 박희도 회장)을 태운 리무진 버스는 중앙고속도로를 단숨에 달려 낙동강 휴게소에서 잠시 가쁜 숨을 쉬고 11시 30분 다부동 현장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차내에서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각자 자기소개와 참여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기도 했다.
발표하는 인사들 면면이 지난 과거 시절 쟁쟁하게 나름대로 잘 산 분들이 많아 내심 놀라웠다. 고 백선엽 장군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분에 대한 일화 소개는 장군에 대한 존경심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백 장군에 대한 나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미천하기 그지없고 중학교 2년 때 6.25 전쟁부터 듣기 시작한 그의 명성은 박정희 정권 때 장관, 그리고 3년 전 그분 서거에서 불거진 국립묘지 안장에 대한 여론의 비판 수렴이 전부였다.
나에게도 소개 시간이 돌아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젊은 군 시절 공산당에 가입하고 여수 순천 군대 반란 사건에 연루된 후 사형 언도까지 받은 사실과 사형 직전에서 백선엽 장군의 피나는 구명운동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다는 내용도 이야기 했다.
박 대통령은 6.25 전쟁 발발 후 군대에 다시 복귀하고 남로당 가입과 활동을 크게 반성하고 참회해 대통령이 되고 오늘날 우리가 타고 가는 고속도로와 차창 밖에 흐르는 푸른 산야 산림녹화는 그분의 설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된 것도. 박 대통령을 죽음에서 살려낸 백선엽 장군의 선견지명 덕분이라고 말했다.
난생처음 보는 칠곡군 다부동(多富洞)은 글자 그대로라면 부자들이 많이 사는 넓은 들녘과 강변, 그리고 낮은 산들이 조금 있는 곳으로 연상 되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승기념관과 동상이 있는 이곳은 전혀 다른 면모로 아주 규모가 작은 조그마한 시골 동네였다.
앞뒤 모두 높은 준령으로 북쪽은 유학산이 기념관 앞을 가로막고 좁은 협곡 사이에 흐르는 작은 개울 틈새로 난 도로가 겨우 숨통을 터 주고 있었다. 인근 주택들도 몇 채를 제외하고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옛날에 영남과 한양을 오 갈 때 행인들이 많아 그들 상대로 장사가 잘되어 부자가 많았다는 연유에서 마을 명칭이 다부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행사 당일 이 좁은 동내에 많은 차들이 마을 골목마다 차고 넘쳐 교통 정리하는 이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기념식 내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식순에 따라 2시에 장엄하게 제막식은 진행되고 이날의 최고 이벤트는 장군의 동상을 가렸던 흰 천이 내려지면서 2분 정도 시간 주기로 360도 회전하는 높이 4.2m, 너비 1.56m 우람한 동상의 전모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맞춰 군악대 팡파레는 이날의 감동을 더 했으며 그분의 맏딸 백남희씨(75)의 감사 인사 도 감명을 주었다.
그녀는 먼저 동상 건립에 힘써준 정부 당국과 경북도민, 그리고 낙동강 전투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특히 군번도 없이 전투에 협력해 전공을 세운 지게 부대 대원 추모비 건립은 자신의 사비를 드려 세웠다는 사실을 소개하자 큰 박수가 터졌다.
그렇다면 다부동 전투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1950년 6.25 전쟁 3대첩은 인천상륙작전, 다부동 전투., 춘천전투로 이 중 다부동 전투는 대한민국의 국운이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처지로 바람 앞에 등잔불 같았다.
당시 다부동에서 밀려나면 대구는 물론 당시 수도 부산이 아무런 방패 없이 함락되어 대한민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전투였다. 이 전투의 중심에 백선엽 장군의 전공이 큰 빛을 주어 북진하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낙동강과 수암산, 유학산을 중심으로 26일간 전개된 치열한 전투에서 아군 사상자가 10,000여 명, 그리고 북한군 24.000여 명으로 당시 이곳을 작전 지역으로 한 1사단장 백 장군 스스로 최 일선에서 싸웠다. 그리고 내가 물러나면 뒤에서 나를 쏘라 지시하기도 했다.
그의 명령은 군 역사에 신화로 남아있고, 이는 다부동 전투 승리로 이어져 북진의 기회가 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행사가 끝난 후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귀경길에 오르면서 사회자가 아침에 자기소개 때 내가 한 박 전 대통령의 남로당 가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 진실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은 자유민주주의란 용어 자체가 없었고 공산주의가 풍미했던 시절에 일제의 가혹한 침탈을 체험한 지식인 그 누구도 개혁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사회주의 유혹에 현혹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날 하루는 박정희와 백선엽 일생에 대해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고 능력을 발휘해 국가와 민족에 기여한 점을 배웠다는 것이다. 제막식 참석을 계기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남은 세월 보람 있는 일을 해보겠다는 각오가 있어 그날 하루는 참으로 의미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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