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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思惟)의 성곽 풍경

최창일 / 시인· 이미지평론가 | 기사입력 2023/08/08 [08:30]

사유(思惟)의 성곽 풍경

최창일 / 시인· 이미지평론가 | 입력 : 2023/08/08 [08:30]

[최창일 칼럼] 걷기는 이동하면서 하는 은둔이다. 걷는 동안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걷기를 통한 사유는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비움이기도 한다. 

 

프랑스 철학자이며 극작가 겸 비평가였던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인간은 호모비아토르 (homo Viator)라고 정의했다. 비아토로는 ‘걷는 사람’ 즉 나그네를 뜻한다. 바꾸어 말하면 걷는 사람, 여행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혜화문 안의 성곽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생각이 다가온다. 성곽의 역할은 시민을 보호하는 데 목적을 둔다. 작은 성곽 돌이 있는가 하면 한 사람이 들기에 버거운 돌도 있다.

▲ 성북동의 성곽길.   © 사진 / 최창일

성북동에는 성곽길로 이어진 길이 있다. 600년 역사의 성곽길에는 도시계획으로 집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성곽길 위에 지어진 집은 구 서울시장 관사다. 한때는 시장이 살았으나 비좁은 관계로 지금은 서울시 역사박물관으로 무료 개방을 하고 있다. 구 시장 관사를 끼고 성곽길을 걷다 보면 혜성교회가 나타난다. 혜성교회도 성곽을 담으로 사용하듯 지어진 교회다. 교회를 들어설 때마다 느낌은 오래된 교회의 느낌이다. 성곽 위에 지어진 건물의 인상일 것이다. 성북동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다. 몇 걸음만 지나면 차범근이 다녔다는 축구의 명문 경신 중고등학교가 나온다. 경신은 성곽의 담을 가장 크게 차지한 보기 드문 성곽길 둘레 학교다. 

 

성곽길에는 돌 틈 사이로 이끼가 자란다. 민들레와 낮은 나무들도 틈을 비집고 자라고 있다. 성곽길은 사유의 길이다. 성곽길을 걸으며 돌 틈의 이끼들을 휴대전화기에 영상으로 남기는 모습도 본다. 

 

로마에도 성곽길이 있다. 교황청을 나와서 뒷길로 나서면 성북동 성곽길과 같은 느낌의 길이다. 로마의 성곽에도 돌 틈에 이끼와 나무들이 자란다. 성곽길 아래는 젊은이들이 만든 수제 공예품을 보자기에 펼치고 파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성곽 아래서 가난한 대학생 청년이 관광객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모습이 묘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튀르키예로 국명이 바뀐 터키(구)도 우리와 같은 성곽길이 있다. 튀르키예는 한국보다 성곽을 이용한 집들이 많다. 아예 성곽 위에 집이 지어진 건축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성곽이 시민을 지켜주었던 시절이 있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그렇고 로마, 한국 등의 많은 나라가 성곽에 의존하는 시절이 있었다.

 

동물은 다 걸을 수가 있다. 걸으면서 몸을 앞으로 이동시키지 않는다면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별한 목적이 없이도 걸을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다.

 

사람이 만든 문명은 구경거리를 남긴다. 구경거리는 산업의 혁명을 가져왔다. 문명의 세례를 받은 이미지 수집가들은 그럴싸한 사진 찍기도 하며 즐긴다. 코로나 19의 파장으로 걷기는 또 하나의 혁명과 같은 문화를 만들었다.

 

유투브들은 재빠르게 코로나로 다중이 걷지 못하는 세계의 곳곳을 현지인, 유학생이나 교포를 통해, 관광코스로 상품화하였다. 그 반응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다. 걷기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만든 여행 유튜브는 150만이 넘는 회원을 가졌다. 

 

걷기는 인간의 욕구 중 하나다. 걷기는 걷기 속도에 따라 다가오는 풍경처럼 여러 개의 상념 시간도 갖는다. 걷기는 정상에 오르는 산행과는 다소 다르다. 걷기는 성곽과 마을의 뒤안길을 통하여 언저리 탐색을 한다. 언저리에는 절대자의 은총이 숨어 있다. 영성을 고양하는 순례, 개선장군과 같은 보무당당한 행진 등이 있다.

 

걷다 보면 내부로 침잠하는 사유의 시간이 만들어진다. 걷기는 자신은 물론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중국의 사상가 장자는 ‘인생은 바쁘게 살지 말라’고 한다. 삶을 누리며 사유의 시간 안에 살기를 말한다. 

 

삶이란 목적지가 없이 여행을 즐기는 것이 장자의 ‘소요유’다.

 

소(逍)는 ‘노닐다’ 뜻이고 요(搖)는 ’멀리 가다’라는 뜻이다. 유(遊)는 ‘떠돈다’라는 뜻이다. 소요유(逍遙遊)는 세 번을 쉬라는 얘기다. 쉬면서 놀고, 쉬면서 가고, 쉬면서 돌아다니는 것이다. 길은 철학자를 탄생시킨다.

▲ 최창일 시인     ©성남일보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걸으며 토론하는 방식으로 탐구했다. 이후에도 철학자의 계보를 이은 독일의 철학자들은 걷기를 즐겼다. 하이델베르크에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 있다. 칸트가 이 길을 걸었는지는 모른다. 서양 근대철학을 빛낸 그의 다른 이름은 ‘생각하는 칸트‘ ’걷는 칸트’다.

 

조선의 역사는 지키는 성곽을 남기고, 현대의 사람은 성곽길을 걸으며 경이로운 사유를 나눈다. 성곽을 걸으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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