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권 칼럼] 성남시 산성동 남한산성 등산로 입구에서 노점상 김밥 장사로 어렵게 평생 모은 돈 6억3000만 원을 전액 사회에 기부하고 소천하신 성남시 거주 박춘자(95) 할머니 이야기다.
할머니는 1929년에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10살 때부터 서울역에서 김밥을 팔기 시작했고, 1960년대 말 성남시 조성 초기 청계천 이주민 틈새에 끼어 성남에 들어왔다. 이후 남한산성 입구에서 평생 김밥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근검절약 구두쇠 한푼 두푼 모아 초기 중앙시장 근처 건물을 매입한 이것이 시대의 흐름에 땅값 상승으로 큰 돈을 갖게 되었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어 홀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성장하고 겨우 중학교 1년 수료로 학업을 중단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처음 시작한 김밥 장사가 평생 직업이 되었다. 1951년 결혼은 했으나 자녀를 출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 당해 평생 홀로 살아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박 할머니가 기부를 시작한 것은 천주교에 귀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낌없이 주는 선행의 일번지 보시가 인생 삶에 목적인 것이 행복의 원천임을 아는 진정한 선구자였다. 박 할머니의 기부 선행은 2008년부터 시작되었다.
’나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놓는 학생들을 돕고 싶다‘는 뜻으로 3억3000만 원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성남지역 장애인 거주 시설인 성남작은예수의집 건립에 써달라고 3억 원을 수녀원에 기탁했다. 지난 2011년에는 어려운 해외동포 어린이를 위해 써 달라고 수녀원에 1000만 원을 기탁했다.
박 할머니는 지난 40년간 지적 장애인들도 돌봤다. 다니는 성당 신부가 거리에 버려진 장애인들을 데려왔는데 김밥 장사를 그만둔 뒤 모아둔 돈으로 상가를 샀고 그 상가에서 나오는 돈으로 지적 장애인 11명을 손수 길러내고 그들은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또 그분은 살던 월셋집을 나와 지난 2021년 사회복지 시설에 들어가면서 함께 살던 장애인도 데리고 갔다.
월셋집 보증금까지 죽으면서 초록우산재단에 기부하라고 변호사를 통해 유언했다. 이 사실을 안 LG복지재단은 지난 2021인 의인상을 수여했다. 박 할머니는 수상금 5000만 원조차 모두 초록재단에 기부했다. 박 할머니는 지난 11일 소천하셨고 13일 오전 발인식과 유해는 화장되어 안성 추모공원 납골당에 안치됐다.
박 할머니가 기부하면서 늘 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돈을 쌓아두고는 못 산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그분은 진정 인생의 맛과 멋을 아는 분이었다. 그의 기부 선행은 오욕칠정으로 용광로처럼 뒤엉켜 뒤끓는 이전투구하는 사바세계에 암시하는 바가 크다.
지금 이 땅은 언 땅을 녹이는 우수 경칩이 지나 이른 봄이다. 하지만 국민들 마음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한여름 삼복더위 끈적끈적 진한 땀 줄줄 흐르는 처지다. 이런 상황에서 박 할머니의 선행 소식은 참으로 상큼하고 시원한 바람이 아닐 수 없다.
나이 들어 늦게 깨달은 보은(報恩)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아마도 박춘자 할머니는 40대에 기부 선행에 열중한 것은 종교의 가르침도 있겠지만 스스로 자신의 어려운 삶에 도움을 준 수많은 사람 대한 보은의 고운 마음의 표현이라고 본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터득하고 보은을 실천한 모범의 산증인이 되신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최대 관심사는 전문의료인들의 집단 사표로 시끄럽다. 물론 전문의들에 나름대로 애로점도 있겠지만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치료를 담보로 흥정하는 모습은 그렇게 좋은 모습은 아니다.
모두가 탐욕의 밥그릇 싸움이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나랏빚이 이미 천조 원 넘어 국가 부도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국민들은 날마다 시간마다 오르는 고물가로 장바구니가 가벼워지는 어려운 처지에 박춘자 할머니의 뜻을 헤아려 전문의들도 이제 치료 현장으로 복귀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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