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학생들에 항거 주제를 주면서 무슨 생각이 떠오르냐, 설문하곤 한다. 항거! 항거는 옳지 않은 것에 순종하지 않고 맞서 것을 모른 이 없다. ’항거‘라면 유관순 애국열사가 떠오른다 답한다. 10년 전에도 대답은 같았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인식은 변함없이 항거의 대명사다.
‘백장미’ 하면 백장미단‘ 또는 백장미파가 인식된다. 항거, 유관순, ‘백장미단’ ‘백장미파‘는 무슨 연관이 될까. 우리는 백장미파라는 단어는 학창시절, 껌을 씹으며 놀았던 깻잎 머리의 언니를 떠오른다. 그러나 백장미단이나 파는 유관순 열사와 결이 닿아 있다. 거룩하기 이룰 수 없는 유관순 열사를 백장미단이나 파에 연관을 짓는 것에 이맛살을 찌푸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백장미단의 이름은 거룩하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이화여대) 출신이다. 독일 뮌헨대학에는 백장미광장이라고 불리는 작은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은 유서 깊은 대학의 건물이 둘러싸 있다. 아무리 둘러 보아도 백장미는 보이지 않는다. 어찌하여 이 광장이 백장미광장이라 불리게 됐을까, 의문을 갖는다. 세상의 모든 단서는 현장에 있다. 대학의 도서관을 지나서 법과대학 건물 외벽에 눈길을 끄는 안내판이 나온다. 백장미광장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다.
나치스 정권 말기에 저항하는 학생 숄 남매가 재학 중이었다. 이들 <숄 남매 플리츠> 역에서 전단을 뿌린다. 남매는 1943년 2월 18일에 체포되어 게슈타포에 모진 심문을 받고 2월 22일 재판에 부쳐져 사형선고를 받은 뒤 그날 바로 형장으로 끌려가 처형이 되었다. 20대 중반의 학생은 끔찍한 단두대로 처형했다. 당시 오빠 한스는 의대생이었고 여동생 소피는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42년 이차대전이 절정에 달할 즘 한스 숄은 그의 친구 알렉산더 뮤모렐이 백장미단 이라는 저항운동 모임을 결성한다. 오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피도 합류한다. 나치의 정권 전복을 염원하며 과격한 문구가 담긴 전단을 배포한다. 다른 대학과 군대 내에도 잠입하여 반나치 파와의 접선을 꾀하는 등 격렬하게 움직였다. 영국으로도 전단이 반출된다. 영국군에서 이를 대량 인쇄하여 전투기에 싣고 땅에 뿌렸다.
BBC방송에서 뉴스로 내보내자 해외의 반향이 일파만파 커졌다. 게슈타포는 백장미단을 체포하기에 혈안이 된다.
유관순 열사가 학교가 아닌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외치듯 독일의 생태 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 전단을 살포했다. 프라이부르크 중앙역에서 트램 5호선을 타고 25분 뒤에 <숄 남매 플리츠>역에 내린다. 역의 광장에는 좌측 슈퍼가 있다, 맞은편 주차장이 있다. 그 오른쪽 평범한 광장 바닥은 A4용지를 흩뿌려 놓은 것과 같다. 가까이 보면 흰 종이 같은 포장석이다. 나치 정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숄 남매를 기리는 광장이며 역명에도 남매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43년 1월 18일이다. 학교 교정에서 6번째 전단을 배포하던 한스와 소피 남매는 수위의 눈에 띈다. 나치였던 수위는 대학의 법률 담당 학장에게 신고한다. 나치에 열렬이었던 학장은 게슈타포에 제자를 넘겼다. 이들이 끌려갈 때 전교생들이 모여 히틀러 만세를 외쳤다. 만세를 부르며 게슈타포에 갈채와 환호를 보냈다. 수위는 상금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수위는 나치 재판에서 5년형을 받았다. 형을 살고 나와 연금까지 받아가며 1964년까지 목숨을 부재했다. 제자들을 형장의 이슬로 보낸 발터 뷔스트 학장은 3년형을 받고 교수직을 박탈당했으나 92세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숄 남매가 전단을 뿌린 광장을 바라보며 백장미단(파)라는 단어에 근거를 알게 한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정상적인 활동을 했다면 큰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한스와 쇼피를 기억하는 뮌헨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정상적으로 학업을 마쳤다면 훌륭한 의사나 학자가 됐을 것이다. 백장미광장을 걸으면서 유관순 열사가 기억되는 것은 숄 남매나 유관순 열사가 백장미같이 순백의 사도였다는 사실이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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