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일보] 도서 추천 기관의 선정 횟수가 많은 시집 전문 출판사 '북인'에서 나온 이건행 시인의 ‘상사화 지기 전에’에 실린 시들은 저마다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읽으면 금세 어떤 사건이 머리에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하면 머리가 아프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주 쉽게 읽혀지는 것이다. 정한용 시인이 평한 대로 이 시인이 궁극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은 “삶에 대한 연민과 뭉근한 슬픔”이다. 사건의 연속인 우리의 일상에 두레박을 깊이 내려 시를 길어 올리는 것이다. 단면의 서사는 이 시인의 주된 시적 장치인 셈이다.
실제로 시집에 실린 ‘사랑의 무게’를 읽으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착각에 빠진다. 시인은 대학생 시절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쫓기면서 첫사랑의 얼굴을 멀리에서라도 보기 위해 충남 공주로 향한다. 하지만 공주 사대 정문 한 쪽에서 첫사랑을 보지 못하고 시내 여인숙으로 간 시인은 밤새 강소주를 들이키며 교사 지망생인 그녀의 안전을 위해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 이후로 그녀를 /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시리고도 웅숭깊게 노래하는데 이는 서사가 시의 훌륭한 질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건물 수위 아저씨의 사건을 다루는 ‘완패’도 그림이 절로 그려진다. 그는 ‘윗놈’이 부정을 통해 100만 원을 챙기면서 자신에게는 고작 10만 원만 줘 사표를 낸다. 시인은 그를 말리면서 옥신각신한다. “나는 아저씨를 붙잡지 못했다 /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 그의 고집도 꺾지 못했다 / 2패지만 숙취처럼 가시지 않는 / 그 무언가도 있어 / 3패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고 독백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한다.
‘막춤’은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주는 블랙 코미디인데 초등학교 상급반 때 시인은 “독재자였던 동네 중학생 형”과 콩쿠르 대회에 나간다. 하지만 혼자 막춤을 추어 청중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아 뒷전으로 밀린 ‘독재자 형’에게 무대 뒤에서 얻어맞는다. 그런데도 그는 예전처럼 “훌쩍거리거나 무릎을 꿇지 않았다” 시인은 “나의 막춤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느껴 / 몸을 조금이라도 흔들면 / 지난 일이 어제처럼 떠오르는 것이다”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은 시나 소설 뿐 아니라 춤, 그림, 조각, 음악 등 모든 예술을 이야기라고 말하는 서사이론 전문가 조너선 갓셜의 『스토리텔링 애니멀』과 그 후속편인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야기에 주목했을 때 평면이 아닌 입체적 시가 된다는 것이다. 이 시인은 “고대 그리스 비극이나 최인훈의 『훠어이 훠이』에 실린 희곡은 이야기면서 시”라며 “서사를 녹여 시로 만들 때 공허하지 않고 견고하다”고 말했다. - 이건행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한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장편소설 『세상 끝에 선 여자』(임권택 감독에 의해 ‘창’으로 영화화)를 펴냈으며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뮤지컬 ‘상대원 연가’의 모티브가 된 동명 시를 2015년 발표하면서 시 창작을 해오고 있다.
2021년 시집 『호박잎쌈』(디지북스공모 선정·이북)과 인문학 소개서인 『인문독서 가이드북』(편저)을 각각 펴냈다. 경제일간지 등에서 사건·미술·증권 담당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일간지에 ‘이건행 칼럼’을 연재하는 한편 인문학 책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