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오빠 생각’은 우리나라 현대 시 태동과 함께 초기의 동요로 분류된다. 1925년 당시 12살인 소녀 최순애가 작사한다. 수원 화성 안쪽 동네에 살던 최순애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사다. 동요에는 일제 강점기, 사회운동을 하던 오빠 최영주에 대한 그리움이 담겼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어도/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오빠 생각> 전문이다. 최순애 (1914~1998) 작사, 박태준 (1900~1986) 작곡이다.
오빠를 그리워하는 어린 여동생의 마음이 순수하고 애틋하게 표현된다. 시골에 남겨진 여동생이 서울로 떠난 오빠를 기다리는 모습을 계절의 변화와 함께 그리고 있다. 한국인의 정서와 서정이 담긴 가사로 사랑을 받았다. 시는 소파 방정환이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에 투고되어 입선된다. 박태준은 잡지의 동요를 보고 감동한다. 5년 후인 1930년에 곡을 붙여 국민가요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원수 아동 문학가는 이 작품에 깊은 인상과 감동한다. 시간은 흐르면서 ‘고향의 봄‘곡을 쓴 이원수는 최순애와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1936년)에 이른다.
’오빠 생각‘은 발표 이후 여러 세대를 거쳐 국외교포까지 애창하는 동요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 어린이들의 정서와 가족애 대한 그리움이 담긴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동요 속 소녀의 오빠는 서울에 활동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수원의 고향 집에 왔다. 오빠는 서울에 갈 때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다 줄게”라고 약속했지만, 오랫동안 오빠의 소식이 끓이곤 했다. 이 약속과 기다림이 시의 내용에 반영되었다.
최영주는 독립운동과 소년운동에 참여했다. 그러기에 집에 오는 기회가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순애 집은 딸 다섯에 아들이 하나뿐이다. 최영주는 가족에게 특별하고 귀중한 존재다. 소녀는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 하늘을 보며 오빠를 그리워하다 울었던 경험이 동요에 담긴다. 최순애는 이렇게 동요의 감성을 키우며 윤석중, 이원수, 서덕출과 함께 ’기쁨’의 동인으로 활동도 한다. ‘그리움‘ ’우산 모자‘ 등을 발표한다.
최순애는 이원수와 결혼 후에도 꾸준하게 동요를 발표한다. 안타깝게도 6.25 전쟁 중에 준비 중이던 동시집 원고가 소실되어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
최순애와 그의 오빠 최영주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특별 전시회가 90여 년 후인 2018년에 그들의 고향 수원에서 개최됐다. 이러한 변화들은 최순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빠라는 정서는 서양에서는 한국어의 ’오빠’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개념이나 호칭은 없다. 유사한 맥락에서 가족 관계에서의 개념 브라더 (Brother)가 가장 기본적인 의미다. 이는 혈연관계의 남자 형제를 지칭한다. 한국의 ‘오빠’처럼 나이 차이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오덜 부라더(Older brother)라는 ‘오빠’의 직역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 된다. 여성 화자의 관점을 특정하지 않는다. 서양 사회에서는 친근한 남성 친구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비공식적인 용어다. 우리의 정서인 오빠와 달리 나이 차이나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대학가에서 여자가 남성을 부를 때, 형이라는 호칭이 사용된다. 서양의 개념이 한국의 정적인 개념을 희석, 모호성으로 호칭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식도 있다. 서양 문화에서는 연인 관계에서 ‘오빠’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서양에서는 나이에 따른 호칭의 구분이 덜 엄격하다. 가족 관계 용어를 비혈연 관계에 확장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다. 오빠라는 호칭은 한국의 독특한 문화적 맥락에서 발전한 개념이다. 서양에서는 이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단일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싸이가 부른‘오빠는 강남 스타일’(2012년) 노래가 빌보드 차트에 올라 세계적 노래가 됐다. 서양에서는 강남 스타일의 오빠는 쉽게 접근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K팝의 세계화와 20세기에 들어서며 연인 관계를 암시하는 의미로 이해했을 법하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오빠’는 단순한 호칭 이상의 복잡한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1926년,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최순애의 <오빠 생각>과는 거리감이 있다. 문화는 늘 움직인다. 시, 소설, 모든 예술의 언어건축 문화는 그중 하나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