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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단지사건 학술회의 열린다"
숨겨진 역사 바로 잡는 계기 될 듯
성남문화원,지역차원 성격규명 모색의 장 마련
 
모동희 기자

지난 1971년 8월 10일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을 학술적 차원에서 재조명 하기 위한 학술회의가 열린다.

 

 

▲지난 2001년 8월 10일 열린 광주대단지 토론회 장면.     ©성남일보

성남문화원(원장 남선우)은 사건 발생 33주년이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차원에서 성격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광주대단지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오는 12월 15일 ‘광주 대단지 사건의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제9회 학술회의를 갖는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회의를 준비한 성남문화원측은 지난 71년 8월 10일 발생한 일명 ‘광주 대단지사건’을 통해 성남재개발초 이주민들의 삶의 역사와 정부 당국의 무모한 사례를 재조명하는데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성남문화원은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관할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은 전국농촌에서 올라온 이농민들로 인해 포화상태에 이른 서울시 인구를 분산하기 위한 무계획적 정책 추진과정에서 발생한 점에 주목하고 이와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를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수집. 정리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이번 학술회의 주제 발표자는 광주대단지 사건 당시 서울시 실무자를 지낸 손정목 박사가‘8.10 사건의 경위’를 주제로 기조발제를 하는 것을 비롯해 하동근 성남문화연구소 소장이 ‘8.10 사건에 대한 입장들’을 발표하고 소설가 박태순씨의 ‘밑에서 본 8.10사건’이라는 주제의 기조발제가 이어질 예정이다.

 

특히 이번 학술회의는 지난 2001년 8월 10일 ‘8.10 3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주최로 열렸던 토론회에 이어 3년만에 열린다는 점에서 광주대단지 사건에 대한 성격 규명이 지역차원에서 어떻게 이뤄질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당시 토론회에서는 그동안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되었던 광주대단지사건을 폭동이 아닌 민중항거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바 있었다.

 

 

▲광주대단지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     ©성남일보

 




71년   廣州대단지 사건 개요


- 산업화  뒤안길  貧者의  처절한  투쟁


황량한  벌판  햇볕만  겨우가린  철거민수용소
핏발선  눈으로  울부짖던  5만의  함성
그것은  난동이  아니라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1971년  8월10일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광주군  중부면  `광주  대단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5만여  주민들의  소요와  난동은  헌법상의  기본권인  `사회권이  거의  진공상태에  있었음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3공화국이  추구한  공업화와  독점자본  중심의  개발전략은  필연적으로  이농현상을  가속화시켜  62년  전체인구의  57%를  점유하던  농가  인구가  69년  49.4%로  급감했다. 


대도시로  밀려온  이농  인구는  서울  변두리지역에  대규모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했고  60년대  후반부터  정부의  도시  미화정책으로  미아동,상계동,중계동,구로동,봉천동,시흥동  등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단지  빈민촌의  수평적  자리  이동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빈민  복지를  위한  정책이  아닌  미봉책은  강제  철거과정에서  수많은  불상사를  초래하면서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건  이후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68년  마침내  서울시는  경기  광주군에  2백만평의  단지를  조성해  50만명의  도시  빈민을  수용할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여  5만5천가구  28만여명을  이주시키기로  했다.  이  계획은  3백50만평에  35만  인구를  수용하는  계획으로  70년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소요  예산  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다음해에  있을  양대  선거를  의식하여  급조한  것이었다.  결국  `경영행정이라는  미명  아래  서울시가  헐값에  매입한  땅을  고가로  되팔아  막대한  차익을  챙겨  시설투자비로  썼을  뿐,  희망에  부풀어  광주대단지로  이주한  14만여명(71년  8월  기준)의  이주와  정착에  기여하지는  못했다.


애초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자급자족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71년  4월  대선과  5월  총선이  끝나자  당국의  분양토지  전매  금지와  함께  황량한  벌판에  실업상태로  주저앉은  주민들은  곧바로  굶주림과  마주쳐야  했다.  가난의  속살은  끔찍했다. 


단대리  철거민  가수용소의  천막은  간신히  햇볕을  가릴  수  있을  뿐,  노천  변소의  오물은  사방으로  넘쳐  인근에  악취를  풍겼다.  굶주린  어린이의  앙상한  뼈마디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모에게는  지게품을  팔래도  팔  수가  없었다. 


1시간30분  걸려  서울  을지로  6가까지  가는  시영버스가  있긴  했으나  차비  35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7월14일  전매행위  금지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이주민들에게  "분양  토지  20평을  평당  8,000~1만6천원씩에  불하하고  대금은  일시불로  하되  7월  말까지  상환하라"고  통보했다.  서울시가  평당  150~400원에  매입한  땅을  이렇게  비싼  가격에  팔겠다고  한  것이다. 


철거민  1가구당  평당  2,000원씩  20평의  택지를  분양하고  대금은  입주  후  3년  되는  해부터  3년간  분할상환토록  하겠다던  약속을  믿고  있던  그들은  통지서  말미의  "만약  기한내  납부치  않으면  해약은  물론  법에  의해  6월  이하의  징역이나  30만원  이하의  벌금을  과하겠다"는  위협  앞에  경악했다.


7월19일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  대책위원회(대표  박진하)를  결성하고  대지  가격을  평당  1,500원  이하로  내리며,  대금은  10년간  연부  상환하고,  향후  5년간  각종  세금을  면제하며,  영세민의  취로  알선과  구호대책을  세울  것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등에게  보냈으나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주민  대표  217명은  대책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개칭한  다음  8월10일  화요일  오전  10시를  `최후  결단의  날로  택했다.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  대열로라는  전단을  뿌리고  벽보도  붙였다.


주민들의  격앙된  기세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서울시는  양택식  시장과의  직접  면담을  10일  오전  11시에  주선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서울시는  자신들의  제의를  스스로  저버렸다.  성남출장소  뒷산에  저마다  피켓,  몽둥이,  삽  등을  들고  가슴에는  `허울좋은  선전  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는  노란색  리본을  단  5만  군중들은  초조하게  서울시장을  기다렸다. 


야산은  플래카드와  피켓의  바다로  변했다.  "배가  고파  못살겠다"  "토지  불하  가격  내려달라"  "백원에  산  땅  만원에  파는  폭리를  하지  말라"  등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11시가  지나도  양시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11시45분.  "또  속았다"는  부르짖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누군가  "내려가자"고  외쳤다.  선두의  300여명이  맨먼저  성남출장소로  몰려갔다.  곧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출장소  옆의  관용  지프도  불탔다.  버스와  트럭을  탈취한  주민들이  대단지를  누비는  동안  진화작업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도,  긴급  출동한  경찰도  모두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여름  비가  추적이고  있었으므로  대부분  비닐  우의를  입거나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시위는  서서히  난동으로  격화되었다. 


 

▲차량 시위에 나선 주민들.     ©성남일보

오후  1시40분쯤  서울시경과  경기도청  소속  기동경찰  700여명이  나타나자  주민들은  더욱  흥분하여  투석으로  맞섰다.  오후  2시  광주경찰서  성남지서,  순찰차,  수진리  남문주유소  등이  불탔다.  빗속에서  쫓고  쫓기는  난투극은  계속되었다. 


굶주린  채  핏발선  눈으로  경찰과  대치하던  주민들은  때마침  지니가던  참외  트럭에  달려들었다,  진흙탕  속에  샛노란  참외가  쏟아져  뒹굴었다.  순식간에  이들은  한  트럭분의  참외를  해치웠다.


오후  5시쯤  양시장이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포  속의  데모는  6시간  만에  일단락 되었다.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했고,  2천만원의  재산  피해가  났으며,  결국  주민  22명이  구속됨으로써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8월11일  곧바로  내무부는  광주  대단지를  `성남시로  승격시키겠다고  발표하고,  양주군수를  초대  시장에  내정하여  독립된  지자체로  운영  관리토록  했다. 


1인당  3.6㎏의  구호  밀가루  지급,  대단지  개발을  위한  공장  건설,  1일  3,000명의  취업  인원  확보,  상수도  건설,  경부고속도로  서초리  인터체인지를  잇는  도로  개통  등  후속대책도  나왔다.


광주  대단지  사건은  무엇보다도  `복음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교회를  흔들어  깨웠다.  대단지  안에  30여개의  교회가  난립해  있었지만  아무도  빈민들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였다. 


사건  직후  김관석  목사가  총무로  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청계천에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를  설립하고,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세미나에는  70~80년대  민주화의  메카가  되었던  종로5가  기독교회관  중심  세력이  집결한다. 


권호경,박창빈,김동완,이해학  등은  필리핀  빈민지역  연구에  몰두하며,  손학규,허병섭,이철용  등도  수배당해  피신중이면서도  도시  빈민  문제에  개안하게  된다.  예수교장로회  김진홍  목사의  활빈교회  설립에  평생  `빈자의  벗으로  살게  되는  제정구가  참여한다.


71년  10월17일  박정희의  위수령  포고와  함께  한신대에서  제명 당한  늦깎이  대학생  이해학은  광주  대단지에  세계교회협의회의  지원을  받아  빈민을  위한  대형  병원을  설립할  꿈을  안고  성남으로  이주한다. 


난동사태를  경험한  대다수  주민들은  어린이  놀이방  등  시설에  모여들고  이를  기반으로  73년에  `주민교회를  세워  현재까지  성남시청  옆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형  빈민  병원  설립의  꿈은  국내의  여러  악조건으로  인해  이루지  못했다. 


지금  주민교회  지하층에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과  `중국  동포의  집이  입주해  이주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을  어루만지고  있다.


                                    실록민주화운동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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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1/15 [22:06]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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