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廣州대단지 사건 개요
- 산업화 뒤안길 貧者의 처절한 투쟁
황량한 벌판 햇볕만 겨우가린 철거민수용소 핏발선 눈으로 울부짖던 5만의 함성 그것은 난동이 아니라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1971년 8월10일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광주군 중부면 `광주 대단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5만여 주민들의 소요와 난동은 헌법상의 기본권인 `사회권이 거의 진공상태에 있었음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3공화국이 추구한 공업화와 독점자본 중심의 개발전략은 필연적으로 이농현상을 가속화시켜 62년 전체인구의 57%를 점유하던 농가 인구가 69년 49.4%로 급감했다.
대도시로 밀려온 이농 인구는 서울 변두리지역에 대규모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했고 60년대 후반부터 정부의 도시 미화정책으로 미아동,상계동,중계동,구로동,봉천동,시흥동 등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단지 빈민촌의 수평적 자리 이동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빈민 복지를 위한 정책이 아닌 미봉책은 강제 철거과정에서 수많은 불상사를 초래하면서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건 이후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68년 마침내 서울시는 경기 광주군에 2백만평의 단지를 조성해 50만명의 도시 빈민을 수용할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여 5만5천가구 28만여명을 이주시키기로 했다. 이 계획은 3백50만평에 35만 인구를 수용하는 계획으로 70년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소요 예산 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다음해에 있을 양대 선거를 의식하여 급조한 것이었다. 결국 `경영행정이라는 미명 아래 서울시가 헐값에 매입한 땅을 고가로 되팔아 막대한 차익을 챙겨 시설투자비로 썼을 뿐, 희망에 부풀어 광주대단지로 이주한 14만여명(71년 8월 기준)의 이주와 정착에 기여하지는 못했다.
애초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자급자족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71년 4월 대선과 5월 총선이 끝나자 당국의 분양토지 전매 금지와 함께 황량한 벌판에 실업상태로 주저앉은 주민들은 곧바로 굶주림과 마주쳐야 했다. 가난의 속살은 끔찍했다.
단대리 철거민 가수용소의 천막은 간신히 햇볕을 가릴 수 있을 뿐, 노천 변소의 오물은 사방으로 넘쳐 인근에 악취를 풍겼다. 굶주린 어린이의 앙상한 뼈마디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모에게는 지게품을 팔래도 팔 수가 없었다.
1시간30분 걸려 서울 을지로 6가까지 가는 시영버스가 있긴 했으나 차비 35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7월14일 전매행위 금지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이주민들에게 "분양 토지 20평을 평당 8,000~1만6천원씩에 불하하고 대금은 일시불로 하되 7월 말까지 상환하라"고 통보했다. 서울시가 평당 150~400원에 매입한 땅을 이렇게 비싼 가격에 팔겠다고 한 것이다.
철거민 1가구당 평당 2,000원씩 20평의 택지를 분양하고 대금은 입주 후 3년 되는 해부터 3년간 분할상환토록 하겠다던 약속을 믿고 있던 그들은 통지서 말미의 "만약 기한내 납부치 않으면 해약은 물론 법에 의해 6월 이하의 징역이나 30만원 이하의 벌금을 과하겠다"는 위협 앞에 경악했다.
7월19일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 대책위원회(대표 박진하)를 결성하고 대지 가격을 평당 1,500원 이하로 내리며, 대금은 10년간 연부 상환하고, 향후 5년간 각종 세금을 면제하며, 영세민의 취로 알선과 구호대책을 세울 것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등에게 보냈으나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주민 대표 217명은 대책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개칭한 다음 8월10일 화요일 오전 10시를 `최후 결단의 날로 택했다.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 대열로라는 전단을 뿌리고 벽보도 붙였다.
주민들의 격앙된 기세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서울시는 양택식 시장과의 직접 면담을 10일 오전 11시에 주선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서울시는 자신들의 제의를 스스로 저버렸다. 성남출장소 뒷산에 저마다 피켓, 몽둥이, 삽 등을 들고 가슴에는 `허울좋은 선전 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는 노란색 리본을 단 5만 군중들은 초조하게 서울시장을 기다렸다.
야산은 플래카드와 피켓의 바다로 변했다. "배가 고파 못살겠다" "토지 불하 가격 내려달라" "백원에 산 땅 만원에 파는 폭리를 하지 말라" 등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11시가 지나도 양시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11시45분. "또 속았다"는 부르짖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누군가 "내려가자"고 외쳤다. 선두의 300여명이 맨먼저 성남출장소로 몰려갔다. 곧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출장소 옆의 관용 지프도 불탔다. 버스와 트럭을 탈취한 주민들이 대단지를 누비는 동안 진화작업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도, 긴급 출동한 경찰도 모두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여름 비가 추적이고 있었으므로 대부분 비닐 우의를 입거나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시위는 서서히 난동으로 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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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시위에 나선 주민들. ©성남일보 |
오후 1시40분쯤 서울시경과 경기도청 소속 기동경찰 700여명이 나타나자 주민들은 더욱 흥분하여 투석으로 맞섰다. 오후 2시 광주경찰서 성남지서, 순찰차, 수진리 남문주유소 등이 불탔다. 빗속에서 쫓고 쫓기는 난투극은 계속되었다.
굶주린 채 핏발선 눈으로 경찰과 대치하던 주민들은 때마침 지니가던 참외 트럭에 달려들었다, 진흙탕 속에 샛노란 참외가 쏟아져 뒹굴었다. 순식간에 이들은 한 트럭분의 참외를 해치웠다.
오후 5시쯤 양시장이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포 속의 데모는 6시간 만에 일단락 되었다.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했고, 2천만원의 재산 피해가 났으며, 결국 주민 22명이 구속됨으로써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8월11일 곧바로 내무부는 광주 대단지를 `성남시로 승격시키겠다고 발표하고, 양주군수를 초대 시장에 내정하여 독립된 지자체로 운영 관리토록 했다.
1인당 3.6㎏의 구호 밀가루 지급, 대단지 개발을 위한 공장 건설, 1일 3,000명의 취업 인원 확보, 상수도 건설, 경부고속도로 서초리 인터체인지를 잇는 도로 개통 등 후속대책도 나왔다.
광주 대단지 사건은 무엇보다도 `복음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교회를 흔들어 깨웠다. 대단지 안에 30여개의 교회가 난립해 있었지만 아무도 빈민들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였다.
사건 직후 김관석 목사가 총무로 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청계천에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를 설립하고,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세미나에는 70~80년대 민주화의 메카가 되었던 종로5가 기독교회관 중심 세력이 집결한다.
권호경,박창빈,김동완,이해학 등은 필리핀 빈민지역 연구에 몰두하며, 손학규,허병섭,이철용 등도 수배당해 피신중이면서도 도시 빈민 문제에 개안하게 된다. 예수교장로회 김진홍 목사의 활빈교회 설립에 평생 `빈자의 벗으로 살게 되는 제정구가 참여한다.
71년 10월17일 박정희의 위수령 포고와 함께 한신대에서 제명 당한 늦깎이 대학생 이해학은 광주 대단지에 세계교회협의회의 지원을 받아 빈민을 위한 대형 병원을 설립할 꿈을 안고 성남으로 이주한다.
난동사태를 경험한 대다수 주민들은 어린이 놀이방 등 시설에 모여들고 이를 기반으로 73년에 `주민교회를 세워 현재까지 성남시청 옆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형 빈민 병원 설립의 꿈은 국내의 여러 악조건으로 인해 이루지 못했다.
지금 주민교회 지하층에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과 `중국 동포의 집이 입주해 이주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을 어루만지고 있다.
실록민주화운동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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