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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씨 참모는 진정 있는가?

"철학없는 천박한 그들"

우공이산 | 기사입력 2011/07/10 [11:54]

이재명 씨 참모는 진정 있는가?

"철학없는 천박한 그들"

우공이산 | 입력 : 2011/07/10 [11:54]

[네티즌 칼럼] 성남시장 이재명 씨가 성남일보에 혈세를 미끼로 댓글실명제를 강제하려 했다는 보도가 나간 뒤 많은 댓글이 생산되고 있다.지금 성남지역사회는 댓글로 연일 화제다.
 
인천과는 판이하게 시민운동(운동? 웃기는 소리이긴 하지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성남에서댓글이 일정한 여론형성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다면 담론문화에 하나의 획을 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시민단체와 진보정당 등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이러한 움직임은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의 댓글에 대한 분석 글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다.댓글 모두를 읽고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 중요한 점이 목격되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이재명 씨를 두둔하는 입장에서 쓴 글 중 일정한 철학에 입각해서 논리적 설득력을 지닌 것은 전무하다는 점이다.
 
댓글 실명제에 찬성하는 글 중 알맹이가 있는 글은 단 하나도 없었다. 왜 댓글 실명제가 필요한지 논거를 성실하게 대면서 이끌어 가는 글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욕을 섞어가며 불성실하게 일방적 주장만 하는 게 전부였다.
 
가장 중요한 건 사실 댓글실명제가 아니라 잠깐 권력을 위임 받은 시장이란 사람이 시민의 세금을 가지고 댓글실명제를 강제하려했다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 그들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런 논점 이탈은 근본적으로 비양심적이라 할 만 하다.가장 중요한 부문을 애써 피해가자니 제대로 된 논리를 펼 수 없었을 것이다.아무튼 댓글만을 놓고 보았을 때 이재명 씨를 철학적 가치적으로 지지하고 보완하는 참모는 없다.

그렇다면 "이재명의 사람들"은 뭐하는 인물들일까? 백 아무개 씨처럼 무작정 언론사에다 전화해서 왜 실명제 하지 않느냐고 수준이하로 따지는 게 할 짓인가?
 
나는 이재명 씨가 고립돼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참모라는 사람들이 그저 그의 얼굴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만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참모들이란 가치적 동지가 아니라 이해관계적 일회적 관계란 말인가? 댓글을 보노라면 이재명 씨의 주변이 참 살풍경하고 억지라는 걸 느끼게 된다.어떤 사안에 대해 논리로 설득하고 문제 있는 것은 적극 인정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것일까?
 
도대체 이재명 씨가 그 참모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관계를 맺고 있기에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가? 혹 수직적, 정치이해적 관계 맺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인
토론문화 자체가 없는 걸 보고 이재명 씨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무엇인지 자꾸만 회의가 든다.
 
이제, 자칭 타칭 참모들, 껍데기들은 가라! 직접 이재명 씨가 나서서 자신의 입장을 밝혀라!
 
댓글실명제 강제는 아름다운 행위인가? 아주 저질적인 반민주적 행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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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교인 2012/03/02 [04:22] 수정 | 삭제
  • 냐 손목아지가 부끄러워....

    시민이 주인인 성남이라고???? 생쑈하지마라
  • 청소부라는 넘 말이다 2011/07/14 [17:18] 수정 | 삭제
  • 별 더러운 넘 다 보겠구먼
  • 사이비언론청소부 2011/07/14 [04:34] 수정 | 삭제
  • 성남일보에 광고 올리는 기업체는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무기한 불매운동에 돌입합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시는 시장님을 걸고 넘어가는 참으로 어리석고 우매한 성남일보의 무개념 무상식 무정체성을 강력하게 항의와 함께 비판하며...이런 참으로 싸가지 바가지 없는 성남일보에 광고를 올리는 업체가 있다면 시민이 주인인 성남이기에 시민의 힘으로 시민의 마음으로 불매운동에 돌입합니다.
  • 사이비언론청소부 2011/07/14 [04:33] 수정 | 삭제
  • 성남일보 폐간의 이유!
    1. 언론사가 아니라 쓰레기 하치장으로 전락했기에...
    2. 주관을 가지고 적는게 아니라 아집과 편집과 비방을 목적으로 하기에...
    3. 일 잘 하는 시장 격려해 주는게 아니라 계속해서 태클을 걸고 있기에...
    4. 제발 부탁한다. 성남일보에서 앞 성남이란 단어를 빼라.
    5. 정 쓸 글이 없으면 차라리 만화라도 연재해라. 눈 피곤하게 하지 말고
    6. 성남일보 애들은 한나라당에서 용돈 주나봐 ^^ 그러니 맨날 이시장만 비방하지...
  • 찬모가 낫지 2011/07/13 [23:23] 수정 | 삭제
  • 참모불용론!! 일당백하니까!!
  • 술통 2011/07/13 [22:01] 수정 | 삭제
  • 참 시간들 많은 가봐 쓸데없는 기사나 쓰고.
  • cctv 2011/07/13 [15:53] 수정 | 삭제
  • 그렇게 계속해서 경거망동 하여라 자리 차지해서 안 갔다고 섭섭아 너의 동선이 파악이 안 되는줄 아니 그러니 계속해서 까불거라 금방 따 밝혀질테니 지금처럼만 하거라 그리고 니는 말이다 나이도 너보다 어린얘한테 안 보이는곳에서는 제발 국왕폐하님이라는 표현은 삼가해주면 좋것다 말끝마다 우리 국왕폐하님 국왕폐하님 듣는놈에 폐하가 아니잖니 알것지 적당히 해먹어라 너무 돌아다니니까 심하게 노출이 되잖니 그리고 항상 몰려다니지 말고 니 혼자해 먹어... 나누기 아까운거니 물귀신작전이니
  • 에 답하는 녀석들 2011/07/12 [19:53] 수정 | 삭제
  • 한 놈도 없네. 지금까지 말한 것은 다 '뻥'이었나? 그래서 를 열심히 '스터디'하면서 '머리 기계' 개조 중인가? 개조만 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일 텐데. 그것이 바로 '노예의 삶'에서 '자유로운 삶'으로의 출발인 데 말이야.
  • 오캄의 면도날 2011/07/12 [19:44] 수정 | 삭제
  • 제품 사용에 관한 위험 경고문 : 손목 자를 때 사용하시오. 다른 부위 자를 때 사용하지 마시오.
  • 맞장구 2011/07/12 [19:09] 수정 | 삭제
  • 교활함에 동의합니다. 진정성이 없어요. 그건 교활한 거와 같습니다. 시장이 반성을 해야할터인데, 타고난 천성이 그래서 그러지는 못할 거 같네요.
  • 어린이 2011/07/12 [09:44] 수정 | 삭제
  • 우와~~여기 오니까~~내 친구들 많네~~~다 애들 밖에 없잔어~~지들 끼리 논다 ㅋㅋㅋ
  • 우공이산님에 따르면 2011/07/12 [00:05] 수정 | 삭제
  • "댓글 모두를 읽고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 중요한 점이 목격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재명 씨를 두둔하는 입장에서 쓴 글 중 일정한 철학에 입각해서 논리적 설득력을 지닌 것은 전무하다는 점이다. 댓글 실명제에 찬성하는 글 중 알맹이가 있는 글은 단 하나도 없었다. 왜 댓글 실명제가 필요한지 논거를 성실하게 대면서 이끌어 가는 글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욕을 섞어가며 불성실하게 일방적 주장만 하는 게 전부였다."
  • 분당맨 2011/07/11 [23:40] 수정 | 삭제
  • 성남바닥의 거지새퀴들은 전부 이 곳에 모였구먼, 발악과 준동의 장이구먼~~~쯔쯔쯔
  • 교활한 2011/07/11 [22:11] 수정 | 삭제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교활함의 극치지!
    pd도 됐다가..총각으로 변신햇다가..인권便호死...등등 일러 무삼하리오!
  • 변호사로 먹고 살아서? 2011/07/11 [22:08] 수정 | 삭제

  • "의장은 의원들 회의체인 시의회의 회의를 진행하는 사람이다."(이재명)

    이것은 시의회, 시의회 의장에 대한 이재명의 '법적 이해'에 다름 아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법만이 폭정을 행할 수 있다.
    폭군은 법의 언어로 말하며 그 외에는 아무런 언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폭군은 '법의 그늘' 아래에 있을 필요를 느낀다.
    그러므로 법의 지배는 불완전하며, 그것은 오히려 무정부 상태보다 훨씬 열등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회의체에 불과한 시의회, 거기에서 회의나 진행하는 사람이 의장이라는 그의 법적 이해에 '숨겨진' 시장권력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시의회? 회의나 하는 것들이 감히! 의장? 회의나 진행하는 것이 감히! 감히 시장권력(이재명)을 우습게 봐? 굴종해! 복종해!"

    이런 읽어낼 수 있는 함의가 가리키는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이다.
    이것은 지나친 판단일까? 이재명을 음해하려는 판단일까? 아니다!
    법은 '본질'에서 '명령-복종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명령-복종이 아니라면 법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역설적으로
    대다수의 사람이 법을 두려워하면서도 법(또는 판결)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사실상 모른다는 사실로서 설명될 수 있다.
    (카프카가 '만리장성 축조 때'라는 유명한 단편에서 그려낸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재명의 시의회에 대한 법적 이해에 대해 우리는 '정치적 이해'를 정면 대응시킨다.
    그것이 바로 일군의 '중우'를 대변하려는 집행권력(시장권력)과 그 대변의 정당성을 토론을 통해 가려내려는 의회권력-이중구조-으로서만 성립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것.
    동시에 이 정치적 이해는 종종 오만방자한 집행권력과 그것을 견제하려는 의회권력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오랜 투쟁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이해'라는 것.

    왜냐하면 진정한 정치가 부재할 때, 심오한 교훈을 간직한 역사가 망각될 때, 우리는 법에, 그 명령-복종의 메커니즘에 의해 인도되는 '개'가 되고 말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재명의 법적 이해에 바탕한 망언이 시의회 안팎으로 두고두고 난도질 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후 그 응보의 반복 또는 증폭의 반복을 느긋이 감상해보자.
    예를 들어 시의원이라면 본회의에 이재명을 세워 이런 물음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시장, 100만 시민을 대표하는 본 의원이 회의나 하는 사람이오? 그럼 회의 안 하는 시장 당신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오?"

    어떤 답이 나올까.

    자, 어떤가? 이만하면 이재명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 댓글실명제는 왜 아닌가? 2011/07/11 [20:58] 수정 | 삭제

  • 아이들은 레고블럭을 좋아한다. 조립에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배, 집, 기계, 자동차, 기차, 탱크 등등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조립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목표로 하는 무언가를 조립하기 위해선 해체해야 한다. 다른 것을 조립하기 위해서 또는 조립한 것이 별로여서 해체하는 것이다. 이 조립-해체가 자유롭다는 데에 아이들이 레고블럭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제한에 가까운 조립-해체의 가능성, 그에 수반되는 자유로움이 얼마나 아이들의 신체적 정신적 성장에 도움에 되는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독자로서 우리는 어떤 기사를 읽는다는 것을 이 레고블럭 놀이에 유비할 수 있다. 읽는다는 것은 그 어떤 기사에 씌어진 것을 재료 삼아 어떤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어떤 의미의 구축물을 조립하거나 해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레고블럭 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독자인 우리는 배, 집, 기계, 자동차, 기차, 탱크 등등에 비유할 수 있는 어떤 의미의 구축물을 조립할 수 있고, 반대로 그것을 해체한 의미의 구축물을 발명할 수도 있다. 조립된 의미의 구축물이든 해체된 의미의 구축물이든 그것을 다른 독자들이나 기자에게 내보일 만해서 '의견쓰기'란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의미하는 것은 '독자로서 읽고 쓴다는 것'이 조립의 방식이든 해체의 방식이든 그것이 기사라는 읽고 쓰는 대상을 분해해 다른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 창조행위는 조금 다른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분해를 통한 새로운 대상의 창조에서 그 행위자인 독자 역시 분해되고 분해되는만큼이나 새롭게 창조된다는 사실이다. 즉 새로운 대상의 창조에 걸맞게 새로운 독자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 정당, 가문, 계급, 지위, 학연, 지연, 성별, 연령과 같은 현실 정체성의 척도들을 무기력으로 몰아넣는 전혀 이질적인 독자의 탄생임은 물론이다.

    요컨대 읽고 쓰는 독자는 '현실에서의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어떤 정체성으로 제약되는 나라는 것은 해체되고 그때그때마다 읽고 쓰는 독자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독자는 어떤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조각나고 파편화된 부스러기 같은 주체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을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주체가 아닌 그저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출현하는 사유가 아닐 수 없다. 주체없는 사유 그 자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어떤 정체성에 갇히지 않는 '복수의 사유 그 자체'인 것이다. 어떤 기사를 읽고 쓰는 독자란 원리적으로는 이렇다.

    아이들이 레고블럭 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어떤 의미의 구축물을 분해하거나 창조해 내놓는 일은 재미가 있다. 또 그것이 의미의 구축행위인 한 의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에 성실한 독자, 이 성실한 경험을 풍부하게 가진 독자는 분해와 창조의 재미와 느낌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재미와 느낌을 통해서 주체없는 사유가 그때그때마다 출현한다는 것, 바로 복수의 사유라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반면 어떤 독자들은 이 실감이 전무하다. 그들은 현실의 단일한 정체성에 갇힌 나라는 것을 통해서만 그때그때마다 출현하는 사유들를 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들은 눈이 흐리다. 눈이 흐리니 무엇 하나 제대로 알아볼 리 만무하다.

    때문에 이들은 주체없는 사유로 나타난 의견들을 현실의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주체로서만 포착하고 판단해 버린다. 이들이 그 의견의 제출자에 대해서 실명이라는 주체를 문제삼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익명의 형태로 나타난 그것을 주체없는 사유가 아닌 실명을 숨긴 주체로 오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들의 요구는 걸 맞는 응답을 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문제삼는 주체는 그것이 실명으로든 익명으로든 주체로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없는 사유로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들에게 거꾸로 읽고 쓰는 독자로서의 자격, 권리가 있는지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독자라고 다 같은 독자가 아닌 것이다.

    인류역사상의 전혀 새로운 인터넷문화가 안착되기 위해서는 이런 얼치기 독자들이 소멸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체없는 사유들에게 심각한 사유의 투쟁을 동반함은 물론이다. 분명한 것은 이 투쟁에서 현실에서 통용되는 주체를 내세우는 얼치기 독자들은 그것이 실명이든 익명이든 주체없는 사유라는 전혀 이질적인 독자들의 출현 앞에서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주체없는 사유가 요구하는 것은 역지사지 또는 그것을 넘어선 형태로 다가오는 또 다른 주체없는 사유이지 주체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주체가 '사유없는 주체'(사유의 부재를 채우는 것은 흔히 그 주체의 의도, 비방, 음해 따위다)일 때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읽고 쓰는 독자로서 주체없는 사유들은 읽고 쓰는 대상과 주체에 대해 고유한 원리를 가지고 있다--'읽고 쓴다는 것은 어떤 대상도 어떤 주체도 분해하고 폭파한다. 와르르! 꽝!'


    p.s.: 시민혈세를 미끼로 한 이재명의 댓글 실명제 '강제'에 대해선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부당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없이 명백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의 '말꼬리잡기'를 반복하는 자는 '추잡한 놈'이라고 말해주도록 하자. 그렇다면 다른 한 가지 논점이 남아 있다. 그것은 '댓글 실명제' 그 자체다. 위 레고블럭님의 글은 그것에 관한 철학(이론)을 보여주는 댓글이다. 이 댓글에 대한 독자로서 말하자면, 이 댓글은 디지털 철학자들의 논의는 물론 현대의 기념비적 철학자들인 레비나스, 들뢰즈의 사고를 소화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레고블럭'과의 유비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여전히 댓글 실명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 댓글을 반드시 밟고 넘어서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다못해 '사상누각'이라도 세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밟아보라, 이 댓글을 무참히 밟고 넘어보라!

  • 숯골마을에서 2011/07/11 [20:11] 수정 | 삭제

  • 우공이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밑줄을 그은 것이 뭣인지 아시는가?
    댓글실명제 실시 여부가 아니라
    시민의 혈세를 미끼로 특정 언론에 (권력을 이용한) 실명제 강제라고 하지 않소!

    귀하도 우공이산 말에 따르면 논점이탈이요, 양심이 없는 자요.
    자기 돈도 아닌 시민의 세금으로 그렇게 압박하는 것은 민주주의적인가요?
    불륜스러운 짓인가요?

    귀하도 불륜 많이 저질렀소?
    왜 엉뚱한 말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려 하는 것이오!

    에이, 쯔쯔쯔...

    이재명 씨 지지자인척 하지도 마소!
    당신 같은 얼간이들 때문에 재명 씨가 더욱 쪽팔릴테니까!!!
  • richman 2011/07/11 [19:39] 수정 | 삭제
  • 우선 저는 이른바 댓글 실명제“에 대해 찬성하는 시민입니다.
    이미 인터넷에서의 댓글은 그 순기능을 잃어버린 채 오로지 단점만이 도드라지고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우공이산님이 쓰신글중에 “댓글 모두를 일고 나름분석한 결과 중요한 점이 목격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재명씨를 두둔 하는 입장에서 쓴 글 중 일정한 철학에 입각해서 논리적 설득력을 지닌 것은 전무하다는점이다.” 저두 우공이산님이 쓰신 칼럼에서 나른대로 분석한결과 철학이나 논리적인 부분은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무작정 이재명 시장이 싫다는 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답답함이 앞섭니다 그리고 참모니 이재명의 사람들이니 하는 발언은 님이 무책임하다는 생각까지 들게합니다. 주변사람 모두가 그러하다고 판단하신 근거나 논리적으로 해명해 주실수있는지요?
    남이하면 불륜이요 내가하면 로맨스다 이런식으로 밖에 제눈에는 안보입니다.
    우공이산님이 쓰신 칼럼에 어떠한 철학과 논리로 이재명씨 참모 또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이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지자체장섹스스캔들은? 2011/07/11 [19:17] 수정 | 삭제
  • 김부선 씨가 여전히 자신의 팬 카페에
  • 따라 부릅니다 2011/07/11 [16:51] 수정 | 삭제

  • 화무는 십이홍 이여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시고 절씨고 차차차 개나 고동 이나 차차차
    목사나 중이나 산적이나 차차차

    그리고 언어게임 속에 있는 우리는 '개'를 충분히 '게'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고동 이나'를 '고동이나'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가 어떤 은유인지 고동이 어떤 은유인지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지만 이 읽어낸다는 행위, 즉 이 '비약'을 통해 우리는 언어게임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언어게임 바깥에 있다고 착각하면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무리만이 게를 개로 썼다고 해서 '천박하고 잡스럽다'고 호도할 뿐입니다.

    '절창'이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로 따라 부르게 되거나 절로 음미하게 되는 노래입니다. 그것이 절창입니다.

    화무는 십이홍이여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씨고 절씨고 차차차 게나 고동이나 차차차
    목사나 중이나 산적이나 차차차.

  • 진실찾기 2011/07/11 [16:13] 수정 | 삭제

  • 시장권력을 앞세운 이재명이란 자의 댓글실명제 강제, 그에게 쓸만한 참모가 없다는 것을 논하는 우공이산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쓴 그대로입니다.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그런 글이라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글이 흔치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글에 어떤 의견을 제시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공이산님의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이것은 그대로 수용하고 대신 이 글의 근저에 깔려 있는 궁극적인 무언가에 주목해보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대상을 읽고 쓰는 데서 '지성'을 잃지 않는 독자라면 누구나 우공이산님의 글의 근저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에 관해서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근저에서 발견된 그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회남자에 나오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 고사는 인생의 길흉화복이 수시로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의미를 끌어들여 역사의 '작희성(作戱性)'이라는 것을 명료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작희성이라는 이 '냉혹한 역사'를 절감하는 사람이라면, 가령 그가 위정자라면 늘 겸손하고 늘 뒤돌아보는 태도를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새옹지마가 널리 회자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기열전에 나오는 자객들의 고사도 알고 있습니다. 그 고사들 중 한 자객이자 가장 빼어난 자객으로 기록된 형가(荊軻)의 이야기는 중국 최초의 중화제국 건설자인 진시황을 단칼에 죽여 버리기 위해 비수를 품고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연(燕)나라의 자객 형가의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새옹지마의 고사에 비할 바 없는 날카로운 그 무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자객 형가에 부쳐 사마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람 소리는 소슬하고(風蕭蕭兮)
    역수는 차갑구나(易水寒)
    장사가 한 번 떠나면(壯士一去兮)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不復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不復還)'! 바로 이것입니다. 역사의 '일회성, 불가반복성'이라는 것입니다. 연나라의 자객 형가의 이야기에서 걸세출의 역사가 사마천이 '꿰뚫어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통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동시에 사마천이란 대역사가가 읊은 것처럼 비장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역사감이라는 뉘앙스도 함께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작희성을 가르치는 새옹지마의 고사도 그렇지만 역사의 일회성, 불가반복성을 가르치는 형가의 고사에서 우리는 역사가 얼마나 냉엄하고 준렬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역사의 작희성-아무리 권세를 누리는 인간일지라도 그것을 희롱하는 역사, 역사의 일회성-똑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역사를 통해, 우리는 오늘이 내일로 그대로 이어지지 않으며 동시에 역사에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 상항(常項) 같은 것이 있다는 인식을 얻습니다.

    우공이산님의 글의 저류에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인식과 상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시장권력을 앞세운 이재명이란 자의 댓글실명제 강제, 그에게 쓸만한 참모가 없다는 비판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 무언가를 쓰는 사람에게는 그것과 상관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고, 반대로 그것이 말하고 쓰는 것을 추동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공이산님의 글에서 우리가 확연히 느끼듯이 사마천이 말하는 것처럼 비장감 같은 것을 동반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우리를 위축시키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우공이산님의 글에서 발견된 역사인식이라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떼어내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오늘 우리의 생각과 삶은 내일의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 역사인식에 입각한 태도란 진실을 추구하려는 태도 그 자체이며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동물에게는 역사가 없습니다. 이와 달리 인간에게는 역사가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알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식을 뛰어넘어 진실에 이릅니다. 진실은 사태의 진상을 파헤치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역사에서 우리가 읽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공이산님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도, 그에 응답하는 이 하찮은 글도, 다른 수많은 독자들이 말하려는 것들도 어떤 진실의 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진실의 추구가 진실을 은폐하려는 무리와의 투쟁을 동반한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실의 추구라는 일에서 우리는 자객의 심정, 어쩌면 진시황을 단칼에 베기 위해 떠나는 자객 형가의 심정도 가져볼 법합니다. 자, 그 진실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을 향해 가봅시다. 이것이 '독자의 권리'가 아니겠습니까? 허위와 기만을 꿰뚫어 진실에 도달하려는 모든 독자의 권리가 이것 아니겠습니까?

  • 나두유진실 2011/07/11 [16:09] 수정 | 삭제
  • "감방에 가는것도 운명이요,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익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시장님! 믿습니다!"
  • 유진실 2011/07/11 [16:00] 수정 | 삭제
  • 시장님을 지지했으면 우리가 이익을 누려야 한다는건 정상 아닐까요

    시장님을 위해 한 표를 행사했다면 누구라도 제몫 챙기기에 나서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정치적입니다. 지지해서 당선되었다면 혜택을 골고루 거두어야지요

    감방에 가는것도 운명이요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익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미쳤다고 열불을 내서 지지했겠습니까 해먹는게 죄악시 되서는 안됩니다.

    시민의 선택은 우선되야 합니다. 시장님 믿습니다. 흔들리면 안됩니다.
  • 저 혼자 떠드니까 2011/07/11 [15:43] 수정 | 삭제

  • 망치는 어디에 사용해야 할까? 못을 때려박을 때.
    톱은 어디에 사용해야 할까? 목재를 자를 때.
    만약 망치 대신 톱을 사용한다면?
    톱 대신 망치를 사용한다면?

    도구의 쓰임새는 알맞게 써야 한다.
    톱으로 망치질을 했다간 톱날이 나갈 것이고
    망치로 톱질을 했다간 목재가 망가질 것이다.
    그(유진실)는 아무 것도 못할 뿐 아니라 작업도구마저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인간이 어떤 말을 사용한다거나 어떤 글을 쓴다는 것도 그렇지 않은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유진실)가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어떤 말로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하는 일은 전혀 있을 수 없다'(크립키).

    '어떤 낱말(또는 어떤 글)의 의미는 그것의 사용이다'(비트겐슈타인)

    저(유진실)만 글쓰나? 저만 쓰는 글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누가 쓰건 그 어떤 글도 '언어게임' 속에 있다.

    언어게임 '바깥'에서는 어떤 말도, 어떤 글도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듣는 '모놀로그(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그(유진실)는 그런 사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낑낑대면서.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또라이'라는 사실의 적나라한 자기폭로일 뿐이다.

    자, 위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언어게임에 함께 하는' 우리 모두 귀 기울여 보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낱말들(문장들)을 그것의 '뜬그름 잡는' 사용으로부터 그것들의 일상적인 사용에로 다시 돌려보는 것이다."

    '표'가 '이익'이라고?...........ㅋㅋ
    이것이 바로 그(유진실)가 우리가 함께 하는 언어게임 밖에 있다고 착각하는 그의 유일한 '전도된 이유'다.

  • 잡것들퇴치 2011/07/11 [15:24] 수정 | 삭제
  • 아고라 네티즌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쥐바기, 쥐새끼라 쓴다.
    이명박씨는 커녕 시정잡배한테도 쓰지 않는 호칭들을 자랑스럽게 쓴다.
    민주당의 최고위원을 지낸 어떤놈은 이명박을 죽여야 한다고 오픈된 곳에서 공개적으로 쓴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인가?
    올라오는 글들에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다는것을 진정코 그들은 모르는가 보다.
  • 글본사람 2011/07/11 [14:44] 수정 | 삭제
  • 글의 옳고 그름을 떠나 글쓴이의 관점이 이 글의 진정성을 훼손하고 있다.
    당신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이명박씨'라고 하나?
    '님' 자를 붙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중립적 관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오픈된 곳에글을 쓰는 이라면 기본이 있어야 읽는이의 맘을 움직일듯하다...
    이 글을 기재한 성남일보도 알만하다........

    "언론, 신문, 기자"라면 고등학교 학보사 기자들도 알만한 것을...........쯧쯧
  • 잘났다 2011/07/11 [13:19] 수정 | 삭제
  • 나를 인정 받을려면 남을 먼저 공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드는데 언론을 한다는 신문이 다른 사람에 손을 빌려 복수의 칼날을 갈아서야 어디원 언론에다 댓글을 달면서 다른 언론을 욕하고 나오면 과연... 언론을 욕하고 나온다면 이건 뭔 망발인지... 조준을 할려면 정확하게 해야지 유탄에 여러사람 죽는 것을 모르바는 아닐 테고 세상 지 잘난 맛에 살긴 하지만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이론은 말이 안되 보인다.
    말을 하고 싶고 무언가를 까고 싶으면 제대로 이치에 맞게 정면 승부를 해야 되는게 아닌가 싶다
  • 유진실 2011/07/11 [13:07] 수정 | 삭제
  • 정치적 참모를 가치적 동지라 하셨습니까?

    "시민운동".... 좋지요.. 얼마나 숭고합니까?

    그러나 그거 아십니까? 그 시민운동 조차 "이익집단"이라고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나옵니다... 이익집단이 뭔고하니

    바로 가치적 동지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위해 모인 집단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철학이 없다고 폄훼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혈연집단이라고 불리는 가족을 제외하고

    우리가 속하고 있는 모든 집단이 바로 가치적 동지이기 이전에 이익집단입니다.

    그리고 바로 "가치"라는 단어의 의미는 다른 말로 "이익"으로 치환될 수도 있습니다.

    "이익"이라는 말을 왠지 불법적인 의미로 말씀하시는데

    그건 종북주의의 일견일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 가치는 바로 "이익"입니다.

    이재명 시장님이 "예수"입니까? 이재명 시장님이 자선사업가 입니까?

    그리고 그 참모들이 어째서 아무런 이익을 원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일방적이고 비정상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까?

    심지어 그 어떤 신도 일방적인 관계를 갖지 않습니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고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이 있는 게 관계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쏟아 붓고

    자녀가 부모에게 일방적인 요구만을 쏟아 붓는다면

    과연 누가 정상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재명 시장님의 참모들.....

    그들이 이재명 시장님에게 원하는 "이익"이라는 거 .... "가치"라는 거......

    과연 정말로 있습니다.... 물론 입니다.... 그리고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린 시장님께 한표를 투자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익과 가치를 기대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월 160만원씩 통장에 입금시켜주시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재명 시장님은 한표라는 정치적 이익을

    성남시민들에게 사회적 경제적 이익으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투자의 의의이고 이런 일의 촉매제로 시장님의 참모들이 있습니다.

    시장님과 참모들은 채무자 이고 시민은 채권자입니다.

    참모분들 ....

    시민들이 날로 먹자는게 아닙니다.

    참모들에게도 시장님 못지 않은 이익과 가치를 기대하며

    성남시 발전에 힘써주십시요
  • 권력에 대한 비판 2011/07/11 [12:33] 수정 | 삭제

  • 맞죠?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탈을 쓴 늑대'로 규정해도 틀리지 않겠죠?
    게다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알고 있습니다.

    1. 지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환경오염, 스탈린주의, 파시즘은 휴머니즘의 산물이라는 것,
    2. 휴머니즘의 가장 극단화된 형태인 '주체사상'에 지배 당하는 저 이북사회에서 우리는 '섬뜩함'을 본다는 것.

    자,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서 우리는 어떤 잠정적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아고라테티즌이여, 마음 아파하지 마오~~~사람 때문에 결코 마음 아파하지 마오~~~'

  • 분당뉴스 2011/07/11 [12:19] 수정 | 삭제
  • 글쓰기 무서운 세상이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은 고사하고, 되레 댓글만 엄청 달려 시달리기 일쑤다. 그래서 '댓글 실명제'란 말이 나왔나 보다.

    '갑'이란 측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다분히 '을'이란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 같다. 즉, 과거에는 공격하는 측면이기에 마음껏 기자회견도 하고, 책임질 수 없는 말에 '의혹'이란 단어를 붙여 던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면서 자신이 이를 방어해야 하는 처지로 변했기에 시작된 논란이다.

    과거는 잊기 마련이다. 자신이 던진 말과 행동은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의 위정자가 했듯이 자신에게 던져지는 말과 행동을 규제하고, 심하게 통제하고 싶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 가려지기는커녕 손가락 틈 사이로 더 많은 햇살과, 그 손바닥 이외로 온통 보이는 것이 훨씬 많기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2011년 7월 6일 '성남일보'가 창간 11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매우 축하할 일이다. 다들 종이 신문을 진짜 신문으로 알고 있을 때, 보이지도 않는 인터넷이란 공간에 신문을 만든다고 할 때 코웃음 쳤을 사람이 많았던 때다. 더구나 열악한 지역 언론의 상황에서 망망대해에 배를 띄우는 심정으로 시작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11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분명히 인터넷 신문도 언론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고, 당당하게(?) 성남시청이 주는 광고를 받고 있지 않은가. '기자실 반납'이라는 언론의 정풍운동을 주도했던 곳도 인터넷 언론이었고, 역대 민선 시장에게 가장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곳도 인터넷이란 공간이었다.

    이것도 유행이라고 지금은 30여 곳에 가까운 인터넷 언론사가 생겨났고, 이들은 아무런 검증 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는 언론의 홍수로 전락하는 주역으로 변해 버렸다. 덕분에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너무 많다 보니 광고 담당자가 직접 나서서 솎아내는 과정을 거치겠다고 으름장을 날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언론의 속살과 몸무게를 마음껏 보겠다고 하고, 서열을 매기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군사정권 시절 언론 검열과도 같은 '댓글 실명제'를 언론사에게 함부로 요구하는 담력까지 보이고 있다.

    이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 또 다시 '성남일보'가 선구자 역할을 자청하면서 나선 것이다. 그러나 방법은 간단했다. 예전처럼 '언론 탄압', '정풍운동'을 운운하지 않아도 된다. 거대 언론이 말하는 '심층 보도', '탐사 보도'를 통해 밑바닥까지 파헤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인터넷의 장점을 살려 독자 그들에게 더욱 더 크게 공간을 열어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봇물 터지듯, 막혔던 말들을 쏟아내는 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미디어의 지표로 '댓글 저널리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던 것이다. 그동안 신문이 기자들만의 전용공간이었다면, 이는 독자가 직접 참여해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고, 치열한 말싸움을 벌이는 열린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셈이다. 일부 과한 측면조차 그들은 자체 정화와 또 다른 댓글을 통해 반박하고, 증명하고 있다.

    언론사는 발행인과 편집인으로 나누거나, 혼자 하는 경우도 있다. 법적으로도 인터넷 언론사는 법인 또는 4대 보험과 상시 직원을 두도록 명시하고 있다. 말 그대로 회사란 존재에 대해서는 정해진 법률과 법령에 따라 왈가왈부 할 수 있다는 표시다. 하지만 언론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이를 막거나, 막고자 했다면 이는 언론을 모르거나, 언론에 피해 의식을 가진 자 일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을 언론으로 보고 '댓글 실명제'에 대해 앞서 나가는 성남일보의 입장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이제는 나머지 언론들이 성남일보의 언론 철학에 적극 동참할 차례다.

  • 아고라네티즌 2011/07/11 [11:36] 수정 | 삭제
  • 정말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가슴 속 깊이에서 나오는 칼럼입니다.

    이런 칼럼을 네티즌 칼럼이라고 메인에 올린 성남일보도 정말 어처구니 없구요

    더이상 성남일보는 언론사의 거름종이는 없어졌구요

    이제는 지역 언론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마저도 없어진듯합니다.

    칼럼 내용을 보고 있으면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무슨 칼럼 쓰시는 분이 신 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을 나누고 있죠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무슨 근거로 철학을 이야기 하면서 사람속(글)을 논하는 건가요?

    당신의 철학에는 사람을 천대하고 무시하며 당신 이하의 사람으로만 보이는 건가요?

    무슨 지식과 철학이 사람위에 있습니까? 당신만 예외인가요?

    '천박하고 잡스러운 지식인' 이라는 포장을 하고 있는 당신

    당신의 모습(글)에서는 추잡하고 삐툴어진 마음과 사람을 천박하게 생각하는

    괴물의 모습만이 보이는 듯합니다.

    사람을 천박하고 사람으로 보지 않으려는 당신

    이제는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 2011/07/11 [11:00] 수정 | 삭제
  • 화무는 십이홍 이여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시고 절씨고 차차차 개나 고동 이나 차차차
    목사나 중이나 산적이나 차차차
  • 참모론 2011/07/11 [10:54] 수정 | 삭제
  • 참모란 1인자를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역사에서 보듯이 통치권자의 정국 전반에 관한 통치기술을 전파하는 책사라 불리어지

    는 참모도 있었고 현대에 와서는 통치권자의 신변보호와 정권강화 차원에서 무소불위

    의 권력을 휘두른 참모도 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서 레임덕이라는 권력프레임으로 인해 모래알처럼 뭉쳤다 흩어졌다를 반

    복하는 이상한 참모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통치권자의 지근거리에서 권력을

    향유한다면 그들은 분명 참모라 할 수가 있겠지요.

    참모의 최우선 조건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능력한 참모는 같은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언제든 다른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능력한 참모가 많다

    면 통치권자는 더 이상 통치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참모는 통치권자를 따라갑니다. 따라서 무능력한 통치권자 밑에 무능력한 참모가 있

    는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참모없이 통치하는 나라는 역사에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희안하고 불행한 나라(?)를 목격하는 행운

    을 잡은 백성입니다. 무능력한 통치권자의 백성들은 하루도 편안히 지낼날이 없습니

    다.

    결론은 참모는 통치자를 따릅니다.

    참모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 참모를 가까이에 둔 사람은 바로 무능력한 통치자

    입니다. 모든 책임은 통치권자가 지는 것입니다.
  • 버럭시장 이재명 2011/07/11 [10:05] 수정 | 삭제
  • 이재명 참모들이 이재명 철학에 동의하거나 가치에 동의해서 있겠습니까?
    지금 떡고물이라도 잡을 수 있으니, 붙어있는게지요.
    이재명 버럭 성질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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