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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서 내 보직은 병원 앰뷸런스 운전병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 기사입력 2014/09/14 [19:49]

군대서 내 보직은 병원 앰뷸런스 운전병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 입력 : 2014/09/14 [19:49]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자서전 -  경기중학교 시절] [성남일보] 성남일보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 책임’을 지난 7월 21일부터 매주 월요일 게재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책임’은 현실정치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2) 경기중학교 시절


경기중학교 때 기억으로 학교 바로 옆에 있던 안동교회 기독교 학생모임인 성화회(聖火會) 회원을 하면서 학교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른 일이다. 그래서 학교 음악회 때면 한 해 선배로 나중에 이탈리아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한국오페라단을 조직한 김신환 씨가 테너 독창을 했고, 나는 바리톤 독창을 했다.

 

6·25전쟁 이후 군에서 제대하고 한국 최초의 성인 직업 합창단인 해군정훈합창단에 취직해 월급도 조금 받고 노래했다.

 

내 키가 큰 편이어서 작고하신 오현명 선생 옆자리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부른 기억이 난다. 성악 말고도 고등학교 때는 브라스밴드에서 수자폰이라는 제일 큰 나팔을 불기도 했다.

▲ 고등학교 동기생들과 2009년 회수연 때.(앞줄 가운데가 필자)     © 성남일보

경기중학교 시절에 운동을 열심히 해 탁구와 빙상, 그리고 배구부에서 활약했다. 중학교 5학년 때,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자면 고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공군에 자원입대했고, 그로부터 2년 후에 만기 제대했다. 그때는 고등학교 2학년이 군에 입대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1년 정도는 학력을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6·25전쟁 초기 서울에서 피난을 가지 못했다. 당시 형님은 의사였던 까닭에 인민군에 징집돼 동네 보건소 같은 곳에서 일을 하다가 어딘가에 숨어 지냈다. 나도 집에 숨어서 살다가 9·28 수복 때 하다가 어딘을 모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내 나이 17살, 1년 뒤에 육군에 입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형님이 나를 공군에 자원입대시키는 바람에 공군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공군병원은 부산 동래온천으로 이전했다. 이후 중공군이 수원을 지나 오산 근처까지 내려왔을 때 다시 제주도로 이전했다. 그 바람에 제주도에서 오래 있었는데, 군대에서 내 보직은 병원 앰뷸런스 운전병이었다. 제주비행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사고가 발생하거나 환자가 들어오면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형님 덕분에 안전한 후방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셈이다.

 

6·25전쟁은 내게 영어를 배우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미군들이 들어왔을 때 영어 선생님들이 제대로 말을 못하는 것을 보고 영어는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직접 미국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후 군대생활을 하면서 미군들과 일부러 가까이 지내며 영어를 익히려고 노력했다. 이런 것들이 이후 미국 유학을 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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