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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주 햄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다
웅변부 활동 기억 ... '합의하지 않는다고 합의한다' 교훈 인생 좌표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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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자서전 - ⑧  미국 유학시절] 성남일보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 책임’을 매주 월요일 게재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책임’은 현실정치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2장


미국 유학생활

 

1. 학부 시절

 

(1) 미네소타주 햄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다

▲ 유학길에 오른 필자(뒷쪽 왼쪽 세번째)를 전송하느라 공항에 나온 대학 동창들. '서울비행장'이라는 간판이 붙은 초라한 여의도 비행장이 금석지감을 느끼게 한다.     © 성남일보

졸업 후 진로와 관련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때 미국으로 유학 가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외무고시를 거쳐 외교관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래서 정보를 수집하는 등 유학을 준비했다. 대학 졸업 전 벌써 미네소타의 주도인 세인트 폴(St. Paul)에 소재한 매컬리스터대학(Macalester College)으로 유학 가 있던 김재원과 안상현 두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인근의 햄린대학(Hamline University)으로 유학 갈 수 있었다. 처음에 그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영어가 별로 늘 것 같지 않다는 기분이 들어 인근에 있는 다른 학교를 소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친구들이 소개해준 학교가 바로 미네소타에서 제일 역사가 오래된 햄린대학이었다. 학생 수가 2,000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학교였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미국 사람들과 어울리기에 적합할 것 같아서 결정했다. 유학 준비는 친구들의 도움도 받았지만 혼자 힘으로 거의 다 했다. 마침내 1957년 연세대를 졸업하고 3개월 후에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이처럼 빨리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미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학길에 오르던 날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고 여전히 병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여의도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탔다. 미국까지 한 번에 비행기가 못 가던 시절이라 도쿄와 괌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8월인데도 사람들이 전부 외투를 입고 있어서 의아하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왜 이렇게 춥냐고 했더니 아침에는 춥고 낮에는 덥다는 말을 해줘서 의문이 풀리긴 했지만, 그것이 미국의 첫 인상으로 남아 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 영화배우 같은 미녀 스튜어디스에게 “scotch and coke, Please!” 하고 말했다. 스카치위스키에 콜라를 타서 달라고 했는데, 후에 안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스카치에 콜라를 섞어 마시지 않는다고 들었다. 

 

(2) 합창단 활동으로 두 번째 학사학위를 받다


햄린대학으로 갈 당시 대학원으로 바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학원으로 바로 가면 기숙사 생활을 하기도 어렵고, 또 첫 해에 미국 학생들과 기숙사에서 지내며 여러 가지를 배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처럼 햄린대학에 간 이유는 대학원을 가기 위한 준비로서 영어 공부와 미국의 환경 적응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햄린대에서 연세대 학점을 전부 인정해주는 한편, 30학점을 추가로 이수하면 학사학위(BA)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학사학위를 꼭 받을 계획은 없었지만 이런 조건이면 두 번째 BA를 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그래서 다음해 6월까지 30학점을 따려고 하니까 외국에서 온 첫 해인 학생은 1학기에 12학점 이상 등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추가 학사학위를 포기하려던 판에 학교 합창단의 할리데이(Holiday) 교수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내가 교회합창단 지휘를 했다는 목사님의 추천서를 본 모양이었다.


그는 내게 노래 테스트를 하더니 대뜸 합창단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합창을 하면 한 학기에 2학점을 준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이미 12학점을 모두 등록했다고 말하니까 그는 학교의 허가를 받아볼 테니 같이 합창을 하자고 권했다. 할리데이 교수가 하자는 대로 하면 계획했던 2학기에 모두 28학점을 따게 되는 셈이었다.

 

이제 2학점만 채우면 되는데, 좀 더 알아보니 학교 부속교회 합창단에서 활동하면 1학기에 1학점씩, 2학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학교 구내에 있는 햄린감리교회 찬양대에서 노래를 해서 학점을 채울 수 있었다. 이렇게 계획과 달리 미국에 간 첫 10개월 동안에 정치학 전공에 음악 부전공까지 합쳐서 두 번째 학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유학경비는 집에서 보내주었다. 당시 합법적으로 보내줄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140달러였다. 등록금 절반을 면제받고 간데다, 기숙사 생활비가 많지 않았으므로 집에서 보내주는 돈에다 조금만 더 보태면 학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학 갈 때 형님과 누이들이 부모님 몰래 준 돈도 있었다. 또 가끔 학교 식당 같은 곳에서 접시도 닦고, 동네 집을 다니면서 풀도 깎아 주고 해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3) 웅변부 활동과 웅변대회 출전

 

1957년 8월부터 1958년 6월까지 10개월 정도 짧은 햄린대학 생활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 웅변부에 가입해 웅변대회에 나간 일이었다. 미국에서 ‘포렌식’(forensic)이라고 하면 웅변이라기보다는 법정에서 하는 토론을 말하는데, 토론하는 클럽이긴 했지만 일단 들어가 나름대로 영어 웅변을 배워보려고 노력했다.


웅변대회는 이 클럽에서 주최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영어 웅변대회 사회를 볼만큼 웅변에 관심이 컸으므로 “외워서 나가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도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웅변 시작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도중에 외웠던 원고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열심히 원고를 외웠고 발음도 괜찮았지만 미국인들과 영어로 경쟁하려니까 너무 떨려서 외운 것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갓 유학 온 아시아의 한 청년이 영어로 웅변에 도전한다고 하니 모두들 관심이 높았다. 중간에 원고를 잊어버려 기권하고 내려오니 얼마나 딱해 보였을까? 하지만 청중들은 기립박수로 격려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토론클럽에서 배운 교훈 중에서 지금까지 잊지 않고 귀중하게 자주 쓰는 교훈이 있다. 상반되는 의견이 합의되지 않을 때 “합의하지 않는다고 합의한다”(We agree to disagree)라는 표현으로 토론을 끝내는 방법, 그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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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5/31 [10:19]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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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어 크레물린 궁 처럼 소통이나 시민이
김영환 장관님, 선거기간동안 후보님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끝까지 진실을 파헤쳐주실것을 기대합니다
정신이 나간 정치인들은 듯거라
김부선씨 화이팅! 진실을 꼭 밝히는데 적극 나서기를 바랍니다.
인도 위에 올라온 정윤 후보 유세 차량
도대체 혜경궁김씨는 누굽니까~!
2013 백발 이라면 그놈 맞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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