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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미국의 소리 방송입니다"
워싱턴DC 아메리칸대학교 입학 ... '미국의 소리'방송국 활동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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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자서전 - ⑨ 석사학위 시절] 성남일보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 책임’을 매주 월요일 게재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책임’은 현실정치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 미국의 소리 방송국 직원들.필자(오른쪽) 옆에 KBS에서 파견나 온 장기범 아나운서와 앉은 여자는 이범준 전 의원.    

2. 석사학위 시절

 

(1) 워싱턴DC 아메리칸대학교


햄린대학을 졸업할 무렵 나는 대학원 공부는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DC에서 하기로 결심했다. “C에도 공부는 서울에서 해야 한다”는 한국식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갈 수 있을 지 길이 조금 막막했다. 그런데 마침 햄린대학의 앤더슨.  총장이 워싱턴DC의 아메리칸대학교(The American University) 총장으로 갔다는 것이 아닌가턴DC에서 햄린대학교로부터 아메리칸대학교 총장에게 보내는 추천서턴DC아 아메리칸대학교로 갈 수 있었다. 햄린대학에서 추천서턴D잘 써준 덕분에 장학금도 금방 나왔다.


이렇게 해서 대학원을 갈 수는 있었지만 또 다른 문제는 학비였다. 등록금 절반은 장학금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 보내오는 돈으로는 생활비와 책값을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문광고를 열심히 뒤적거리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하루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고 집안일을 도와주며 출퇴근 운전을 해주면, 숙식을 해결해주는 동시에 한 달에 120달러의 월급을 준다는 광고가 내 눈길을 끌었다.

 

당시 한국에서 유학생에게 보낼 수 있는 한 달 상한선이 140달러였다. 그 때 한국은 6급 공무원의 월급이 평균 40달러 정도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 돈이 얼마나 큰돈이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일단 만나보니 그 사람은 국무부의 고위 관리로 부인과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다리는 완전히 쓰지 못하고 양쪽 손도 불편했지만 글씨를 쓰면서 사무를 다 볼 수 있을 정도의 장애인이었다. 내가 할 일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으켜주고, 간단하게 세수하는 일을 도와주며, 아침식사를 준비해준 다음에 휠체어에 태워 차로 약 15㎞ 가량 떨어진 국무부의 사무실까지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오후 5시에 그를 다시 픽업해 집으로 데려와서 간단한 저녁식사를 준비해준 다음, 밤 10시에 침대로 옮겨 주는 것이다. 전동 휠체어여서 집안에서 혼자 불편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으므로, 그 정도가 내가 해줘야 할 일의 전부였다.


시간적으로 학교수업을 병행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고삐 풀린 말처럼 뛰어다니던 내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 지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며칠 더 생각해보겠다고 망설이듯 말하니까 그가 다시 제안하기를 “나는 상당히 마음에 드는데, 좀 해보고 나서 월급도 올려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당신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유학 와서 영어를 배워야 되는데 내가 좋은 영어 선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영어 선생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상당히 쏠렸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그 사람이 보기에도 착실한 동양사람 같고,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책임감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때 나는 워싱턴DC에 온 이후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결국 하루 더 고민한 뒤 다음 날부터 그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인연이 2년 동안 이어졌고, 나중에는 그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얼굴이 생생한 피터슨(Peterson) 씨는 듀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국무부에 취직했는데, 그와 함께 지내는 2년 동안 그는 나의 영어 개인교수 같았다. 덕분에 내 영어 실력도 크게 늘었다. 또 식사를 제때에 하게 되면서 모든 생활을 규칙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서양 요리도 많이 배워서 간단한 서양 음식을 만드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만큼 요리 선수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를 침대에 옮겨주고 난 다음, 밤 10시에 나가 새벽 1시까지 데이트를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때부터 좋아진 것은 더 이상 집에서 돈 받을 필요가 없게 됐고,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모범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만일 약속을 어기면 그가 몹시 불편해지는 상황을 맞아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는 책임감이 몸에 배게 되었다. 그와 생활한 덕분에 나는 처음 계획한대로 2년 만에 석사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2) 박사과정 입학과 ‘미국의 소리’ 방송국 입사

 

미국 유학 3년 만에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도 많이 배웠다. 본래 계획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서 외무고시를 보고 외교관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한국에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면서 정국이 몹시 불안해졌다. 나 역시 군사혁명은 곤란하다고 생각해 미국에서 가끔 열리던 군사정부 반대 데모에 나가곤 했다. 아버지와 형님도 지금 한국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겠다고 야단인데 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해서 그러냐고 만류했다. 이런 시국에 귀국을 서두르기보다는 아예 박사학위까지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보내왔다.


나도 군사정치 반대와 관련해 뭔가 역할을 하려면 미국에 있는 것이 좋을 듯했다. 아버지와 형님의 의견을 따라 박사과정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에 간 지 3년 만에 학사와 석사까지 마치고 박사 공부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남의 집 살림을 해주고 운전기사를 하는 일에 조금 싫증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일이 풀리려고 그랬던지 바로 그때 내가 다니던 한국 감리교회에서 알게 된 고 황재경 목사님이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국에서 한국말 잘하는 아나운서를 뽑는다고 한 번 신청해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황 목사님 자신이 이미 미국의 소리 한국말 방송국에 다니고 계셨던 까닭에 정보를 미리 알았던 모양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대학교수로 가도 처음 월급이 700달러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풀타임도 아니고 일주일에 36시간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월급을 400달러 쯤 주었으니 사실 그 자리는 한국에서 온 고학생들 사이에서 제일 좋은 일자리로 알려져 모두가 부러워하는 상황이었다. 황 목사님의 조언에 따라 일단 지원을 한 후 나도 자신이 없어서 KBS에서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 파견 나와 있던 장기범 아나운서와 상의도 하고 우리말 공부도 조금 더했다. 거의 완벽하게 표준말을 구사한다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해서 무사히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 취직할 수 있었다.

 

(3) ‘미국의 소리’ 방송국 시절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서 한 일은 매일 새벽 2시에 출근해 텔렉스로 들어온 원고를 3시간 가량 한국어로 번역한 다음, 6시에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한국을 향해 방송하는 것이었다. 방송시간은 대략 14분 정도로 내용은 주로 세계뉴스와 한국뉴스였다.


“대한민국 국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워싱턴DC에서 보내드리는 미국의 소리입니다. 오늘 세계뉴스를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방송이었다. 당시 라오스를 비롯해 동남아 등에 내전이 많았고 따라서 그런 세계뉴스가 주를 이뤘다. 가끔 한국뉴스를 곁들였는데, 학생 데모나 인권에 관련되는 예민한 소식도 조심스레 방송했다. 새벽에 나가면 사무실에서 간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편안한 분위기에서 하루 약 5시간 정도 일하고 그 많은 월급을 받았던 것이다.

 

서울 가족도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매일 내가 전하는 뉴스를 듣다보니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가족들은 감기가 들어 콧소리를 내는 것까지 곧바로 알아차리고 전화를 해서 감기 걸렸느냐, 쉬어야 하지 않느냐며 안부를 묻곤 했다. 그 무렵에는 미리 광화문우체국에 가서 예약을 해놔야 국제전화를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 만큼 거리감 없이 내 목소리를 가족들이 들었던 것이다. 나 역시 방송을 하는 동안 한국의 가족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늘 받곤 했다.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서 일하는 동안 큰 방송사고를 낸 적은 없었다. 다만 새벽 2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3시에 가서 3시간 번역할 것을 급하게 2시간 만에 번역하고 방송한 일은 두어 번 있었다.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 일하기 시작하면서 생활에 변화가 왔다. 형편이 나아지다 보니 우선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4번가(4th street, S.W)에 위치한 방 하나짜리 아파트는 미국의 소리 방송국과 가까웠고 또 의회 인근이기도 했다. 지방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그들과 친분을 쌓을 기회도 자연스럽게 생기곤 했다.

 

특히 매년 서너 번 대통령이 중요한 TV 시정연설 등을 했는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의원 두어 커플 정도를 초대해서 스키야키 같은 요리와 술을 함께 마시며 같이 보곤 했다. 당시 사귀었던 의원 중에 부인이 가끔 먹을 것을 가져다주곤 했던 레넌이라는 국방위원장도 있었다. 십년 후 내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에는 대부분 은퇴하는 바람에 정치활동에 큰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비록 아파트는 방 하나짜리 원룸 형(efficiency apartment)이었지만 월급도 많았고 총각이기 때문인지 여자 친구들이 김밥 등을 만들어 와 파티도 자주 했다. 요즘도 직접 요리를 자주 하는 편이지만 그때도 파티를 하면 내가 직접 요리를 해서 대접했다. 당시 나의 단골메뉴는 짜장면이었다.

 

짜장면은 예닐곱 명 정도를 초대해 이야기하면서, 한쪽에서 고기를 넣어 짜장을 볶고 다른 쪽에서 면을 삶아서 내놓을 수 있었다. 연세대학교 다닐 때 누이들은 물론 친구들과 어울려 춤을 자주 추곤 했지만, 이때도 유학생 친구들과 파티를 하면서 춤을 많이 춘 기억이 난다. 그 중에서 특히 잊지 못하는 것은 후배 오학근의 부인이 임신 8개월 반일 때 놀러 와서 춤을 추고 돌아갔는데, 바로 그날 밤 아들을 낳은 일이다. 그렇게 사교를 많이 했지만 이상하게도 결혼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은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낮에 일하고 밤에 오는 경우가 많아 저녁수업이 많았다. 새벽에 나가서 방송하고 돌아온 뒤에 한잠 자고 낮 시간에 책을 보다가 학교에 갔으니까 시간적으로 학교를 다니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새벽일을 하는 등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공부한 끝에 2년 후 박사과정 72학점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서는 1965년까지 4년 간 일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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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8/01 [16:53]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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