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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으로 정치발전운동을 해야 한다"
재미한국연합회와 주주협회 활동 참여 ...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만남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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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자서전 - ⑩ 재미 민주화운동] 성남일보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 책임’을 매주 월요일 게재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책임’은 현실정치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3장


재미 민주화운동과 박사학위

 

1. 재미 민주화운동

 

(1) 외도의 시작, 한국통신사 운영


1964년 박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모든 일이 쉽게 풀리다보니 긴장이 풀렸다. 종합시험과 논문만 남아 곧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옆길로 가기 시작했다. 먼저 한국 정치에 관한 관심도 없지 않았던 까닭에 시작한 일이 바로 한국통신사 설립이었다.

 

당시 뉴욕에서 한국일보사가 사진판을 만들어 미국 각지에 보급하고 있었지만, 그 이외에는 한국 소식을 알 수 있는 통로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 관련 소식을 미국 내 한국 유학생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나는 동아일보 사진판을 보급하기로 하고 이민을 와 있던 한광년 씨, 그리고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의 동생인 김정현 씨와 함께 한국통신사를 설립했다. 내가 이사장을 맡아 섭외 등을 담당하고 한광년 씨가 사장으로 재정을 맡기로 했다.


한국통신사를 설립한 후 당시 워싱턴에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있던 진철수 씨를 통해 미국 내에 동아일보 사진판을 보급하기로 동아일보 본사와 계약을 맺고 신문 발행을 시작했다. 먼저 동아일보 본사에서 당일 신문 한 장을 항공우편으로 보내주면 한 사장이 새벽에 직접 공항에 나가서 그 신문을 받아왔다.

 

다음에 신문을 약 80% 크기로 복사해서 미국 내 각지의 구독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는 방식이었다. 100% 크기로 복사하면 종이 값이 비싸서 80%로 줄여서 복사를 했다. 이렇게 발송하면 서울보다 3일 정도 늦은 날짜에 독자들이 신문을 받아볼 수 있었다.


한광년 사장이 인쇄기술자 한 사람을 두고 직접 일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적자가 많이 났다. 나중에는 동아일보 본사와 협의해서 본래 광고가 있던 자리에 미국 내 광고를 채우는 방식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150여명에 불과하던 구독자가 한국 유학생들의 반응이 좋아지면서 점차 발행부수가 늘어났고, 재정 압박도 점차 덜해져 현상유지를 할 정도가 되었다. 이로써 내가 의도했던, 군사정부에 반대하고 조국의 정치발전에 관심을 갖는 유학생 수가 늘어났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사업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돈벌이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가능한 많은 독자에게 한국 실정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선 나머지 신문 값을 싸게 해서 여러 사람이 보도록 하는데 신경을 더 많이 썼기 때문이다. 직원들 월급을 줘야 하는 상황에서 수입은 늘 신통치 않아서 집사람에게 핀잔을 자주 듣기도 했다.

 

(2) 재미한국학생연합회와 민주협회 활동


동아일보 보급을 새로운 사업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내게 더 중요한 것은 역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일이었다. 그때 내가 선택한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정치개혁에 관한 것이었다. 서재필 박사의 독립협회운동을 분석하기로 했다.

 

앞으로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재필 박사가 했던 것과 같은 운동, 다시 말해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그 정신적 뒷받침을 하는 독립신문 같은 것을 발행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사진판 발행사업도 실은 새로운 신문을 만드는 것이 당장 불가능하여 우회적으로 택한 방법이기도 했다.

 

신문 발행과 더불어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독립협회와 같은 기능을 할 조직, 즉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래서 설립한 것이 바로 ‘재미한국학생연합회’였다. 이 연합회는 워싱턴DC를 넘어선 미국 전체 한국 유학생 모임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이미 미국의 주요 도시에 한국 유학생 모임이 있었으므로 이들과 연락을 취해서 한데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해내기에 다소 벅찬 일이긴 했다. 비교적 크고 한국 사람도 많이 사는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등지의 한국 유학생회 회장들에게 연락을 취한 끝에 1966년 워싱턴DC에서 창립총회를 열 수 있었다. 각 지역의 회장들이 워싱턴DC에 모이려면 여비가 많이 들어 그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미국 내 돈 있는 한인들의 보조를 받는 등 겨우 창립총회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 대부분이 군사 쿠데타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줘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약 30명의 각 지역 학생회 회장들과 유지들이 모인 창립총회에서 나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연합회는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인 모임이기는 했지만 정치적 성향은 사실 다양했다.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또한 외국에 나와서 조국을 너무 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았던지라 조국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의 모임 정도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나중에 이들 중에서 공화당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만 따로 모아서 모임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독립협회의 정신을 뒤이어 만든 민주협회다.

 

하지만 재미한국학생연합회와 민주협회 활동이 독립협회처럼 활발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재미동포 사회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유학생 중심의 조직이었기에 회원 증가에 한계가 있었다. 워싱턴DC만 하더라도 유학생이 200~300명 수준에 불과했다. 또한 외국에 나와서 자기 나라를 비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여론도 강한 편이어서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소리를 너무 높게 내지 못했다.

활동은 주로 한국에서 학생 데모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터지거나 입법이 이뤄지면 합동으로 성명을 발표하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한국대사관에 전달하면 받아가지고 서랍에다 넣거나 없애버린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유학생 차원의 운동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벌인 운동이기는 하지만 거의 독립협회 운동을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임했던 기억이 새롭다. 민주협회는 과격한 행동을 피하고 온건하게 운영하려 했던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서재필 박사가 자신감에 충만한 나머지 너무 과격하게 빨리 개혁하려다 실패했으므로, 이보다는 점진적으로 정치발전 운동을 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국대사관으로서 상당히 신경 쓰이는 활동이어서 한국대사관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중앙정보부 사람들과 논쟁을 하면서 맞붙어 싸울 지경으로 기세가 등등하기도 했다. 정보부 쪽에서 나온 사람들이 겁이라도 줄라치면 마구 대들곤 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오면 통상적으로 동포사회 유지들과 학생회장들을 초청했는데 우리는 초청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민주협회 활동과 관련해 또 한 가지 기억나는 일은 당시 워싱턴 홀리데인 인(Holiday Inn) 지배인을 하던 노진환 씨이다. 민주협회에 금전적 지원도 하고 나한테 개인적으로 잘 해주어 나중에 워싱턴지역 한인회 회장이 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후일 3선 개헌을 지지하는 바람에 회장직으로부터 축출되기도 했다. 그런데 몇 년 뒤 국내에 들어와 보니 노진환 씨가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들어와 있어 깜짝 놀랐다.

공부를 끝내면서 서울의 정치에 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미국 신문에 글을 보내기도 했다. 유력지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나의 기사가 국내 언론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기도 했다. 당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29일 한국의 안보와 통일을 위해 미국, 일본, 소련, 중공 등 사대국의 긴장완화보장을 주장한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씨의 제안을 지지하는 한 한국인의 편집자에 대한 편지를 실었다. 투고의 주인공은 한국민주협회의 의장 오세응이란 연세대 출신 아메리칸 대학 박사 소지자다. 그는 한때 이곳 유학생회장도 지냈던 젊은이인데 최근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투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은 한국의 분단에 대해 책임져야 할 자들을 나무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한반도에서 높아지고 있는 긴장을 제거할 가능한 방도를 모색해야 할 때다. 이 문제에 관해서 최근 야당인 신민당은 관심을 표명했으며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통해 미국, 일본, 소련, 중공 등 이른바 4대국에 의해 보장된 남북 긴장완화를 제안했다. 이러한 사정은 국민들 사이에서 야당이 국가안보의 중요한 부문에 관해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오히려 건전한 신호인 것으로 보인다.

 

신민당이 제안한 것은 수행하기에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야당에 의해 제안된 긴장완화를 향한 노력을 환영해야 한다. 한편 한국의 분단에 책임이 있고 미군을 철수시키려하고 있는 미국은 가능한 해결책을 능동적으로 주도해야 한다.”
- 경향신문 1970년 12월 30일


(3) 한국 정치인들과의 접촉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많이 다녀가는 곳이었다. 동아일보를 보급하는가 하면, ‘재미한국학생연합회’와 ‘민주협회’ 회장을 하면서 정부를 많이 비판하다보니 자연스레 국내에도 내 이름이 알려졌다. 그 바람에 워싱턴DC를 방문하는 정치인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찾았다. 대표적으로 이철승 전 신민당 당수는 정치정화법(=政淨法)에 묶여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미국에서 10년간 지낼 때 우리 집 근처에서 살아서 자주 만날 기회를 가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유진산 전 당수 등 주로 야당 정치인들과 자주 만나곤 했다. 여당 정치인들하고도 만나긴 했지만 야당 정치인들 사이에서 같은 편이라고 소문이 나 있어 많이들 찾는 편이었다. 특히 유진산 당수의 경우에 친아들처럼 아끼는 한창영 비서를 미국으로 유학 보낼 때 내가 조금 도와준 인연으로 더 가까워지기도 했다.
 

야당 정치인들과의 교류가 활발하다보니 1967년부터는 우리 집에 손님이 떨어지는 날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집사람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미리 연락한 경우에는 식당에서 회비를 거둬서 회의를 할 수 있지만, 갑자기 지나가는 길에 들르면 집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들른 사람 중에 유진산 전 당수나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요즘 돈으로 20~30만 원 가량을 활동하는데 보태 쓰라며 주시곤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미국에 아들과 처남이 있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사람들이 밤낮 끌고 다녀서 자주 나를 찾지는 않았다. 그렇게 만나면 주로 정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얼마나 공화당이 악랄한지 설명을 많이 해주시곤 했는데, 개중에는 외국에까지 나와서 젊은 사람들을 자극할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점잖게 넘어가는 분도 없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처남, 즉 이희호 여사의 동생이 나와 가까워서 워싱턴DC에 있을 때 자주 만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해서 좋아했다. 김 전 대통령도 늘 회의가 있을 때면 “오 박사가 잘 한다”며 칭찬을 해주곤 했다. 그런 인연으로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고 난 뒤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하는 자리에 참석한 적도 있고, 개인적으로 나를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눈치를 조금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계파 정치를 싫어하여 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분에게 섭섭하게 해드린 것은 없다.
이철승 전 당수의 경우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줄 만큼 아주 가까이 지낸 편이다. 나 역시 이 전 당수의 아들 동우 군을 친동생 같이 대하곤 했다. 동우 군은 우리 집에 오면 늘 콜라를 사다놓기 바쁘게 먹어치우곤 했던 특별한 기억이 난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까 아버지가 반대하는데 국회의원에 입후보해서 떨어지는가 하면, 아버지가 출마를 말리는 바람에 한때 부자 사이까지 나빠졌다고 해서 내 가슴이 아팠다.

 

(4) 미국에서 접한 정인숙 사건

 

그 즈음 한국에서 터진 정인숙 사건은 나도 우연히 미국에서 관련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때 내가 추천하여 한인회 회장이 된 노진환 씨가 정인숙과 깊이 관련됐음을 알게 됐다. 노진환 씨가 하루는 한국에서 어떤 여자를 한 명 데리고 왔다. 노 씨는 이미 결혼을 했고 부인도 아주 똑똑한 경기여고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백악관 북쪽에 위치한 16번가 우드나호텔이라는 아주 좋은 아파트를 자주 드나들더니 급기야 거기에 여자가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부남이 다른 여자와 사귀나보다 하고 예사로 여겼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자가 바로 정인숙 씨였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한인회 회장인 노진환 씨에게 데리고 와 잘 보살펴 주라면서 자금도 지원해준 모양이었다. 그런 인연 때문이었는지 이후 노 씨는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뽑혀서 국회에서 다시 나와 대면하게 된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그 여자가 한강변에서 오빠에게 총을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거기에 아이가 하나 있었고, 정인숙 씨가 서울에 올 때 아이를 워싱턴DC에 두고 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후에 그 아이가 우드나호텔에 그대로 살고 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노진환 씨가 도와주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한참 떠돌기도 했다. [계속]

 

- 손 전화 : 010 - 5261 -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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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8/08 [20:45]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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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어 크레물린 궁 처럼 소통이나 시민이
김영환 장관님, 선거기간동안 후보님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끝까지 진실을 파헤쳐주실것을 기대합니다
정신이 나간 정치인들은 듯거라
김부선씨 화이팅! 진실을 꼭 밝히는데 적극 나서기를 바랍니다.
인도 위에 올라온 정윤 후보 유세 차량
도대체 혜경궁김씨는 누굽니까~!
2013 백발 이라면 그놈 맞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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