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HOME > 뉴스 > 정치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박사 논문 '서재필 개혁운동과 오늘의 과제' 출간
서재필 박사의 개혁운동의 실패 원인 규명 ... 1993년 책으로 출간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자서전 - ⑪  힘들게 받은 박사학위] 성남일보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 책임’을 매주 월요일 게재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책임’은 현실정치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2. 힘들게 받은 박사학위

 

(1) 벼랑 끝에서 기회를 준 은사 박사종합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했다. 하지만 주임교수가 계속해서 내게 기회를 준 것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처음 종합시험에서 떨어진 뒤 그 다음 해 유학생연합회와 민주협회, 그리고 동아일보 일까지 적당히 하면서 공부에 열중했지만 다시 실패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종합시험에 두 번 실패하면 학교에서 쫓겨난다고 했다. “이제 박사학위는 물 건너갔다”는 심정에 낙담하고 있었다.

 

그때 주임교수였던 마이클 린지(Micheal Lindsay) 경이 나를 불러서 말했다. “너는 공부하면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공부를 안 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열심히 하겠느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번만 기회를 더 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나자 주임교수가 내게 준 것은 약 200권에 달하는 책 목록이었다. 그러면서 1년 동안 이 책으로 열심히 공부해보라고 했다. 너무나 고마운 나머지 그 후에 정말로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다. 영국의 세습 귀족이면서 상원의원이기도 한 그는 중국인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인정이 많았을 뿐 아니라 학생들을 격려해서 공부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는 듯했다.

 

결국 세 번째 시험을 통과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쓸 자격을 얻었다.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시키려고 노력하는 교수와, 그러한 교수를 갖고 있는 아메리칸대학에 대해서 지금도 존경심을 갖고 있다. 내가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 워싱턴DC에 1년에 한두 번은 들렀다. 그때마다 나는 교수 부부를 한국식당으로 초대하곤 했었다.

 

종합시험 통과 후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일 역시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종합시험을 통과하고도 한참 지난 1970년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결혼한 뒤 거의 4년이 지났을 때 학위를 받았으니까 집사람은 상당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집사람은 생계를 책임지면서 연년생으로 아들과 딸을 낳아서 키웠다. 남편 원망할 새도 없이 몇 년이 후딱 흘러갔다고 말했다.

 

(2) 박사학위 주제, 서재필 박사의 독립협회

 

앞서 언급했듯이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서재필 박사의 개혁운동이다. 서재필 박사는 1884년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13년이 지난 뒤에 의사가 되어 귀국해 독립협회를 조직한 독립운동가다.

 

논문은 그가 1896년 귀국했을 때부터 시작한다. 귀국했을 당시 고종은 서재필 박사에게 외무부장관 자리를 제안한다. 하지만 서재필 박사는 외무부장관은 우리나라를 개혁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그 대신 신문을 발행하겠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고종은 당시 돈 5,000원이라는 거금을 지원했다. 이 자금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독립신문이다. 그 첫 판이 세상에 나온 것이 1896년 4월 7일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이 날을 ‘신문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서재필 박사는 독립신문이 개혁정신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 정신을 실행하는 조직으로 독립협회를 구상했던 것이다. 당시 독립신문의 기사 내용을 보면 독립협회가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17년 전 이야기인데, 예를 들어보면 이런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침을 맞는 것은 좋지만 침을 소독도 하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사용하는 것은 비위생적이다’. ‘온돌방의 구조를 잘 만들면 따뜻한 것이 아래로부터 올라오기 때문에 위생에 좋다’. 이런 식으로 그 시절의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것을 개조하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주로 나온다. 일종의 생활혁명 내지 생활개혁부터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독립협회의 전성기는 1898년 가을,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독립협회가 어느 정도로 힘이 있었는가는 참석자 면면을 보면 잘 드러난다. 정부의 장관급까지 참석해서 질문에 답변할 정도였다. 종로 네거리에서 처음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참가자는 8,000명 가량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를 감안하면 그 열기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만민공동회는 외교사절단이 오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힘이 붙는다고 판단한 독립협회는 중추원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것이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화근이 되고 말았다.

 

중추원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다. 서재필 박사가 생각하기에 그때 소련이나 일본이 각종 이권을 내놓으라고 야단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 혼자서 반대하기가 어려우니 중추원에서 승인한 것만 해주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안 된다고 거절하면 좋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중추원의 역할은 고종이 정치를 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반발을 유발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중추원 의원의 절반을 고종이 임명하고 나머지 절반은 독립협회에서 추천하도록 한 부분이었다. 개혁파가 절반 이상 차지하는 중추원이 생기게 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던 보수 세력들로서 이런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온갖 모략을 시작하게 된다. 그들은 이것이 결국 공화국제도를 만들어서 황제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라면서 극력 반대했다. 고종이 힘이 없어지면서 독립협회에서 정권 실세들이 나올 텐데, 그렇게 되면 큰일 난다는 것이 그들의 인식이었다.

 

또 한 가지 서재필 박사가 트집을 잡힌 것은 그가 12년 간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 시민권을 받은 사실이었다. 대한제국 국적을 버린 미국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정치에 너무 깊이 관여한다는 비난이 먹혀 들어간 것이다. 결국 서재필은 1898년 말 미국으로 돌아간다.

 

▲ 박사논문 출판 기념회(왼쪽에 김용환 의원과 조순승 의원)     © 성남일보

내 박사학위 논문의 주된 결론은 개혁운동이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자신들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너무 이상적으로 나아가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실패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박사학위 논문의 주된 테마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서재필 개혁운동과 오늘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1993년에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3) 박사과정 수료 후에 한 결혼

 

우리 집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동아일보 사진판 발행과 더불어 민주협회 활동을 한창 하던 무렵인 31살 때였다. 나는 총각 시절에 인기가 좋아 한국 유학생들은 물론 미국 학생들과도 데이트를 많이 한 편이었다, 어느 날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전 주미대사 장리욱 씨의 동생 장대욱 씨가 “딸의 친구가 워싱턴의 한 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고 있는데 한 번 만나보지 않겠느냐?”며 나를 집으로 식사 초대를 한 것이 계기였다. 장대욱 씨는 당시 워싱턴DC 국회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집사람에게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집사람을 만나기 전에 결혼하려고 했던 여성이 한 명 있긴 했다. 한국에서 미용사로 미국에 온 미모의 아가씨였다. 정이 들어서 서울의 가족에게 이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연락했더니 나중에 누이한테 연락이 오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시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결혼하겠다는 아가씨의 어머니가 우리 집에 왔는데, 그 아가씨보다 여섯 살 정도 더 많은 재혼한 어머니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매너도 나쁘다면서 아버지가 노발대발해 당장 때려치우고 귀국하라고 하셨다는 이야기였다. 서울에서 신붓감 사진도 보내는 등 나를 결혼시키려고 애쓰는 상황에서 의외의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집에서는 많이 놀라서 반대한 것이었다. 결국 가족의 반대로 그 아가씨와 결혼하지 못하고 얼마 후에 만난 것이 우리 집사람이었다.

 

당시 돈벌이도 시원치 않고 종합시험도 통과하지 못해서 학위논문마저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집사람하고 만난 이후 약 2년쯤 데이트를 하면서 연애했다. 그렇게 해서 내 나이 33살, 집사람 나이 30살이었던 1966년 7월에 결혼했다. 종합시험과 논문이 남아있긴 했지만 공부가 거의 끝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혼할 당시 생각은 공부가 끝나는 대로 취직할 계획이었으므로 박사학위 종합시험과 논문을 빨리 마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문 보급과 민주협회 활동 등이 겹치면서 계획보다 3~4년 늦어졌다. 결국 주말에 택시운전을 하면서 생활비를 보태야 했다. 택시운전 수입이 그나마 괜찮아서 겨우 체면치레를 한 셈이었는데, 그래도 박사과정 종합시험에는 계속 낙방해서 집사람 볼 면목이 없었다.

 

집사람 곽경자(郭庚子)는 젓갈로 유명한 충남 홍성군 광천이 고향이다. 서울여자의과대학(고려대 의대 전신)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네브라스카주 병원에서 인턴을 지냈다. 나와 결혼할 때는 워싱턴DC에 있는 하워드(Haward)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의사시험이 국가시험 형태로 단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별로 치르거나 5~6개 주가 합쳐서 시험을 치른다. 집사람은 그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이후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하는데 이점이 많았다. 미국의 경우 미국 면허증을 가진 의사가 서명해야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국내 거주 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곤 했다. 한국에 들어와서 취직한 곳은 안국동에 있던 한국병원으로, 그 병원 소아과 과장으로 10년 정도를 근무했다. 이후 개업해서 다시 15년쯤 개인병원을 운영했다.

 

결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억나는 것은 워싱턴DC에서만 결혼식 축가를 족히 50여 차례 부른 일이다. 미국 생활 중에 한국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열심히 했고, 그때 독창을 많이 했다. 그래서 문화의 밤이나 한국에서 손님이 와서 노래를 불러야 할 일이 생기면 수시로 나를 찾곤 했다. 당시 「가고파」라든가 「보리밭」 같은 노래를 주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 아내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 성남일보

또 한 가지, 한국에 돌아와서 충북 중원 국회의원도 하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으나 지금은 타계한 친구 김선길의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준 일이 떠오른다. 들러리를 선 것은 내 평생에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축가까지 불러달라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떻게 한꺼번에 두 가지를 하느냐고 했더니, 축가를 부르고 들러리 역할도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성당 2층에서 축가로 헨델의 「라르고」를 부른 다음 헐레벌떡 1층으로 내려와서 들러리를 섰다. 내 결혼식 때는 켄터키에서 교수를 하고 있던 그 친구가 무려 9시간 자동차를 타고 와서 들러리를 선 적이 있었다. 당시 어느 목사님은 주례를 맡으면 축가는 으레 오세응을 시키면 된다는 식으로 예약을 받아오곤 했다. 그렇게 축가를 불러주면 사례비로 20달러 가량 받기도 했다.

 

  (4) 아들 오주석과 딸 오미석에 대하여  

 

나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 오주석과 딸 오미석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두 애들이 네 살과 세 살 때 다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서울 여의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미국에 가서 처음 다니던 햄린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미국법다. 미국에서 출생한 외국인은 18세 때 미국 국눁 함얻을 수 있으나 이럴 경우 한국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 나는 아들에게 “국적을 2개 갖는 것은 불법이고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데 만일 네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갖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데, 그럴 경우 나는 앞으로 너를 내 아들로 여기지 않 함것이다”라고 확실히 말해주었다.

 

아들은 “물론 한국 국적을 포기하면서까지 미국 국적을 얻지는  않겠습니다” 한국선선히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 그리고 육군에 들어가 36개월 복무하고 만기제대를 했다. 그 후 연세대학교가 3원을 졸업했으나 아버지의 전문분야인 정치 근처에 오는 것은 나도, 아들도 원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들이 미국 국적을 얻지 않은 것,  한국군에 들어가 무사히 만기제대까지 복무한 것, 나의 도움 없이 연세대학교에서 대학원까지 공부한 것, 졸업 후 취직에 관하여 나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 등등에 대하여는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 46살이 될 지금까지 제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한데 대하여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딸 오미석은 여의도에서 중학교 다닐 때부터 많이 잘못 됐었다. 사춘기에 부모가 다 바쁜 탓에 서로 대화할 시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집사람은 종일 병원에서 일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간섭은 안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살았다.

 

딸은 중3때부터 학교 가기를 싫어하고 유명 가수의 음악회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엄하게 다룬 것이 더 나쁜 영향을 끼쳤다. 결국 딸은 정신장애의 병을 얻어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휴학하고 계속 병원과 집에서 지내고 있다.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따뜻하게 대해주었더라면 저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에 죄책감이 들 때가 많다.

 


배너
배너
배너
기사입력: 2015/08/23 [21:44]  최종편집: ⓒ 성남일보
카카오톡 트위터 페이스북 공감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뉴스 플랫폼 - 댓글 Here!
공공연한 사실 아닌가요? 일설에 의하ㅓ면
현안문제에 귀를 귀울여주심을 감사드립니
희망이 보입니다!
공원기금 적립 잘한일입니다 전임자는 한
은수미 시장도 골치 아플거야. 이놈 저놈
지역에 시민운동가가 있나요? 잿밥에만 관
근데 여기 속한 어떤 녀석 은수미캠프에
하따 존나 빠네! 누굴 위해 이 지꺼리
모 씨는 민주당 사람이 아니라 우리쪽 사
이제 네가 ?방이다! 니가 처먹고 싶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