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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으로 시작한 정치 활동
유진상 총재 도움으로 정계 입문 ... 신민당 비례대표 18번 국회 입성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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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자서전 - ⑫ 유진상 도움으로 정계 입문] 성남일보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 책임’을 매주 월요일 게재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책임’은 현실정치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4장


야당으로 시작한 정치활동

 

1. 유진산 도움으로 정계 입문

 

(1) 유진산 전 총재와의 인연


1970년 박사학위 논문이 끝나갈 때 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한국으로 돌아가 정치를 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에 남아 대학에 자리를 잡을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내 처지를 잘 알고 있던 유진산 전 신민당 총재의 비서 한창영군이 유 전 총재와 연락을 하더니 한국에 돌아와 정치할 뜻이 있는지를 물어왔다.


유진산 전 총재는 그 분이 미국에 오셨을 때 유학생들이 모이는 강연회를 주선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 친밀감을 보이셨다. 그런 연고로 아들 같은 한창영 비서를 미국에 유학 보내려고 하니 도와달라는 부탁까지 받게 되었다. 그 후로 내게 야당투쟁 관련 자료 같은 것도 보내주시면서 관심을 표명하신 바 있다. 나도 그 분을 편안하게 생각했다.

 

유 전 총재는 이미 그 전부터 나를 만나면 공부가 언제 끝나느냐고 물으면서 여기서 오래 살면 뭐하느냐, 같이 일하자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박사까지 공부한 사람이 한국의 야당으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정일형 박사 같은 분이 있긴 했지만 예외적인 경우였다. 나이 37살의 젊은 박사가 월급을 받으면서 일할 당직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회의원뿐 아니라 비서의 봉급도 많이 부족한 때였다. 돈이 없어 비서 한 사람 월급을 둘에게 나눠주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 귀국해 봐야 야당 생활을 하면서 탄압이나 받아야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결국 유 전 총재 말씀이 “자넨 국회의원밖에 할 게 뭐 있겠느냐?”고 제안하셨고, 나도 “국회의원이야 제가 제일 하고 싶었던 건데, 부족하지만 그렇게 봉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귀국하기로 최종 합의가 이뤄졌다. 형식은 재미 한국유학생을 대표해서 신민당에서 전국구로 영입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 유진상 신민당 당수고 하와이대학교에서 연설할 때 통역으로 수행했다.     © 성남일보

장인이 국회사무처에서 총무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던 영향인지 집사람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대학 진학 때도 법과대학을 가려다 의과대학에 갔다고 했다. 그런 개인적 기호도 작용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후 내가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시중만 들고 뒷수습만 해서인지 나중에는 지긋지긋해 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 팔자가 이것 밖에 안 되지” 하는 식으로 즐겁게 대처한 편이었다. 집사람도 반대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내가 국회의원이 된다고 하니까 처가에서는 사위가 국회의원이 된다면서 매우 반겼다.

다만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는 일은 정작 아버지께서 내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국회의원이 되기 2년 전인 1969년에 돌아가셨다. 힘들게 유학 보내 애쓰면서 뒷바라지를 한 막내아들이 국회의원이 된 걸 보고 돌아가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2) 신민당 비례대표 18번


유진산 전 총재는 내가 귀국을 결심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나를 비례대표 18번으로 넣은 일이다. 당시 전국구 17번까지는 자동 당선이었기 때문에 특별당비를 3,000만원씩 내라고 했다. 내 경우에는 유 전 총재가 18번으로 해주는 바람에 이 돈을 내지 않아 지금도 고맙게 여긴다. 돈 내고 전국구를 샀다는 이야기를 안 듣게 된 것이다. 물론 당선된 이후에도 돈을 내라고 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정서와 달리 유진산 전 총재는 내게 돈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특별당비를 내라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우리 집이 여유도 좀 있던 시절이라 형님과 상의해서 유진산씨 몰래 총무국장에게 당비를 조금 내긴 했다. 나중에 이 특별당비가 문제가 되어서 조사한다고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는 안 냈다고 대답한 바 있다. 당시 풍토에서 정치를 하다 보면 당수가 남들 모르게 써야할 돈이 많았다. 이렇게 유 전 총재는 내가 돈을 내지 않도록 하면서 가능한 당선권에 가깝게 나를 배치하는 배려를 했던 것이다.

 

선거 결과는 신민당 전국구 의원이 24번까지 당선되면서 나도 무난하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당선 직후 미국에 있던 아내와 두 아이들을 모두 서울로 데려왔다.

 

(3) 신민당 전당대회에 대한 부정적 인상


1971년 국회의원이 되기는 했지만 나는 사실 박사학위를 마친 1970년에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1970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 때는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 전당대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 받았다.

 

전당대회는 이틀에 걸쳐 서울시민회관(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당시 전당대회와 관련해 반드시 기록에 남겨야 할 것은 혼탁상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완전히 파벌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얼마나 돈을 주느냐에 따라 철새처럼 옮겨 다녔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표 단속도 아주 노골적이었다. 자기 쪽 대의원들이 탄 버스가 도착하면 식사비는 물론 용돈까지 대주면서 지정된 여관에서 바깥출입을 못하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다른 계파 사람들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막았던 것이다. 결국 여관마다 대의원을 감금시켜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갓 돌아온 내 눈에 그런 풍경이 낯설기도 했지만 솔직히 야만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해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씨가 들고 나온 ‘40대 기수론’이 한참 힘을 받을 때였다. 유진산 전 총재가 ‘참여 속의 개혁’을 하자는 주장과 대조적으로 이들은 신민당 지도부를 이른바 ‘사쿠라’로 몰아붙이면서 공세를 퍼부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렇게 유 전 총재를 공격하던 사람들이 정작 유 전 총재 앞에 오면 태도가 바뀌는 것이었다.

▲ 이철승 의원의 망명 시절 첫 아들과 기념촬영.     © 성남일보

예를 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밖에서는 당 총재의 대여투쟁이 불투명하다고 비판하여 청중의 인기를 모았으나, 막상 총재 앞에서는 손을 떨면서 어려워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나이가 가장 젊어서 그랬는지 상당히 순종적이었다. 다만 이철승 전 당수만은 유 전 총재 앞에서 대들고 큰소리를 치곤했다.


이철승씨는 5·16 이전에 국회 국방위원장으로 있었다. 또한 김대중, 김영삼 의원보다 정치 선배였다. 특히 5·16 당시 이철승 씨는 일본 도쿄에서 유진산 총재와 함께 있었다. 이때 유 총재가 이철승 의원에게 “앞으로 우리 야당이 정신 차리고 군사정권과 확실하게 투쟁하자”고 말해서 이철승 의원이 이에 용기를 얻고 강하게 군사정권에 반대하면서 귀국을 늦추었다.

 

이후 유진산 총재는 귀국하여 서울에서 정부 입장에 반대했고, 이철승 의원은 일본에서 더 강경하게 군사독재를 반대함으로써 결국 정정법에 묶여 10년 동안 정치를 못하고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이철승씨는 70년 전당대회에서 유진산 총재가 자신을 밀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유 전 총재는 그 해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씨를 지지했다. 그의 이 같은 결정은 당시 당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던 실력자로 김영삼 후보와 가까웠던 인지(仁之) 고흥문 부총재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관측이 많다. 그러나 유 전 총재는 대회 날까지 결정을 미루면서 후보 모두에게 잘 대해줬다. 이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루는 이철승씨 부인이 우연히 유진산 씨를 만났는데 유 전 총재가 “이제 남편 때문에 바쁘게 되겠네”라고 말했다. 이것을 이철승씨 부인은 유진산씨가 자기 남편을 도와주려는 것으로 오해해서, 소석(素石• 이철승 씨 아호)계는 유진산씨가 자기들을 밀어준다고 철석같이 믿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철승씨 부인이 우리 집사람 의과대학 선배이기도 해서 들은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유진산씨가 이철승 씨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넘는 후보가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2차 투표를 하게 되는데, 이때 유진산씨가 이철승씨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철승 계가 김대중 씨를 미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이철승씨와 같은 호남 출신으로 이철승씨의 직계 참모였던 조연하 의원이 유진산씨가 배신했다고 말하면서 이철승씨 표를 김대중씨 쪽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이철승계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서면서 김대중씨가 당선되었다,

 

사실 이철승씨는 개인적으로 김대중 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철승씨는 1차 투표 후 기분이 상해 퇴장하고, 조연하씨가 막후에서 조정을 해 김대중씨한테 표를 몰아주었던 것이다. 그 해 전당대회와 관련한 언론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민당은 29일 하오 4시 30분 2차 비밀무기명투표 끝에 유 당수의 추천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김대중 씨를 대통령후보로 지명, 선거태세 정비에 앞서 유 체제에 큰 타격을 가져왔다. 아침 10시35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지명대회는 유진산 대표가 28일 하오 중앙상위에서 추천한 김영삼 후보와 유 대표의 택일 추천을 거부, 독자 출마한 김대중 후보가 팽팽히 맞선 가운데 1차 투표는 과반수 미달로 2차 투표에 들어가 김대중 후보는 재석 8백84명 중 4백58표를 얻어 과반수인 4백43표에 15표 초과, 후보로 확정된 것이다.

 

김영삼 후보는 4백10표를 얻었으며 산표는 16표였다. 한편 과반수 미달로 무효가 됐던 1차 투표에서 김영삼 후보는 재석 8백 85표 중 4백21표를 얻어 과반수인 4백43표에 22표 모자랐으며 김대중 후보는 3백82표를 얻어 김영삼 후보에 39표 뒤졌었다. 나머지 82표는 유 대표와 이철승 씨 등에서 산표가 됐었다.


유 당수는 치사를 통해 명년 양차 선거는 주한미군 감축을 비롯 한반도의 운명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정권교체의 차원을 넘어서 민족사활이 걸린 민족의 제전이 된다고 말하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사람은 자기 영광이란 생각에 앞서 어려운 조국운명과 당운을 걸머지고 십자가를 멘 생각으로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어느 후보를 선출하자는 말은 일체 하지 않고 탈락한 이철승 씨나 후보사퇴 선언을 한 박기출 씨 등의 태도를 치하했다.  경향신문 1970년 9월 29일


이렇게 김대중 씨가 대통령 후보가 되고 나니 유진산 씨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유세를 다녔다. 김대중 씨보다 15~16 살 정도 위인 유진산 씨가 나중에 “이 늙은 몸을 끌고 다니며 지지해달라고 다녔는데, 나한테 그럴 수 있느냐” 그런 속마음을 가진 것도 잘 알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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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9/05 [12:58]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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