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으로 시작한 정치 활동유진상 총재 도움으로 정계 입문 ... 신민당 비례대표 18번 국회 입성[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자서전 - ⑫ 유진상 도움으로 정계 입문] 성남일보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 책임’을 매주 월요일 게재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책임’은 현실정치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4장
1. 유진산 도움으로 정계 입문
(1) 유진산 전 총재와의 인연
유 전 총재는 이미 그 전부터 나를 만나면 공부가 언제 끝나느냐고 물으면서 여기서 오래 살면 뭐하느냐, 같이 일하자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박사까지 공부한 사람이 한국의 야당으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정일형 박사 같은 분이 있긴 했지만 예외적인 경우였다. 나이 37살의 젊은 박사가 월급을 받으면서 일할 당직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회의원뿐 아니라 비서의 봉급도 많이 부족한 때였다. 돈이 없어 비서 한 사람 월급을 둘에게 나눠주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 귀국해 봐야 야당 생활을 하면서 탄압이나 받아야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장인이 국회사무처에서 총무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던 영향인지 집사람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대학 진학 때도 법과대학을 가려다 의과대학에 갔다고 했다. 그런 개인적 기호도 작용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후 내가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시중만 들고 뒷수습만 해서인지 나중에는 지긋지긋해 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 팔자가 이것 밖에 안 되지” 하는 식으로 즐겁게 대처한 편이었다. 집사람도 반대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내가 국회의원이 된다고 하니까 처가에서는 사위가 국회의원이 된다면서 매우 반겼다. 다만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는 일은 정작 아버지께서 내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국회의원이 되기 2년 전인 1969년에 돌아가셨다. 힘들게 유학 보내 애쓰면서 뒷바라지를 한 막내아들이 국회의원이 된 걸 보고 돌아가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2) 신민당 비례대표 18번
선거 결과는 신민당 전국구 의원이 24번까지 당선되면서 나도 무난하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당선 직후 미국에 있던 아내와 두 아이들을 모두 서울로 데려왔다.
(3) 신민당 전당대회에 대한 부정적 인상
전당대회는 이틀에 걸쳐 서울시민회관(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당시 전당대회와 관련해 반드시 기록에 남겨야 할 것은 혼탁상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완전히 파벌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얼마나 돈을 주느냐에 따라 철새처럼 옮겨 다녔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표 단속도 아주 노골적이었다. 자기 쪽 대의원들이 탄 버스가 도착하면 식사비는 물론 용돈까지 대주면서 지정된 여관에서 바깥출입을 못하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다른 계파 사람들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막았던 것이다. 결국 여관마다 대의원을 감금시켜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갓 돌아온 내 눈에 그런 풍경이 낯설기도 했지만 솔직히 야만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밖에서는 당 총재의 대여투쟁이 불투명하다고 비판하여 청중의 인기를 모았으나, 막상 총재 앞에서는 손을 떨면서 어려워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나이가 가장 젊어서 그랬는지 상당히 순종적이었다. 다만 이철승 전 당수만은 유 전 총재 앞에서 대들고 큰소리를 치곤했다.
이후 유진산 총재는 귀국하여 서울에서 정부 입장에 반대했고, 이철승 의원은 일본에서 더 강경하게 군사독재를 반대함으로써 결국 정정법에 묶여 10년 동안 정치를 못하고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이철승씨는 70년 전당대회에서 유진산 총재가 자신을 밀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루는 이철승씨 부인이 우연히 유진산 씨를 만났는데 유 전 총재가 “이제 남편 때문에 바쁘게 되겠네”라고 말했다. 이것을 이철승씨 부인은 유진산씨가 자기 남편을 도와주려는 것으로 오해해서, 소석(素石• 이철승 씨 아호)계는 유진산씨가 자기들을 밀어준다고 철석같이 믿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철승씨 부인이 우리 집사람 의과대학 선배이기도 해서 들은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유진산씨가 이철승 씨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이철승씨와 같은 호남 출신으로 이철승씨의 직계 참모였던 조연하 의원이 유진산씨가 배신했다고 말하면서 이철승씨 표를 김대중씨 쪽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이철승계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서면서 김대중씨가 당선되었다,
사실 이철승씨는 개인적으로 김대중 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철승씨는 1차 투표 후 기분이 상해 퇴장하고, 조연하씨가 막후에서 조정을 해 김대중씨한테 표를 몰아주었던 것이다. 그 해 전당대회와 관련한 언론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민당은 29일 하오 4시 30분 2차 비밀무기명투표 끝에 유 당수의 추천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김대중 씨를 대통령후보로 지명, 선거태세 정비에 앞서 유 체제에 큰 타격을 가져왔다. 아침 10시35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지명대회는 유진산 대표가 28일 하오 중앙상위에서 추천한 김영삼 후보와 유 대표의 택일 추천을 거부, 독자 출마한 김대중 후보가 팽팽히 맞선 가운데 1차 투표는 과반수 미달로 2차 투표에 들어가 김대중 후보는 재석 8백84명 중 4백58표를 얻어 과반수인 4백43표에 15표 초과, 후보로 확정된 것이다.
김영삼 후보는 4백10표를 얻었으며 산표는 16표였다. 한편 과반수 미달로 무효가 됐던 1차 투표에서 김영삼 후보는 재석 8백 85표 중 4백21표를 얻어 과반수인 4백43표에 22표 모자랐으며 김대중 후보는 3백82표를 얻어 김영삼 후보에 39표 뒤졌었다. 나머지 82표는 유 대표와 이철승 씨 등에서 산표가 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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