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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산 계냐 이철승 계냐?
첫 상임위 활동, ‘한진 사태’로 얻은 유명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자서전 - ⑬ 8대 국회와 목요회] 성남일보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 책임’을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책임’은 현실정치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2. 8대 국회와 목요회

 

(1) 유진산 계냐 이철승 계냐?


앞서 이야기 했듯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유진산씨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국회의원이 되고 나니 이철승씨는 나를 자신의 계파라고 믿었다. 그만큼 친했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시절 내가 한국 정치인 가운데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이 바로 이철승씨다.

 

그 무렵 그는 정정법에 묶여서 10여 년 동안 외롭게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의 부인이 내 누이와 친구이기도 하고, 또 집 사람과는 의과대학 선후배 사이여서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나도 한국 정치에 관심이 있던 차여서 그 분께 잘해드렸다.

 

그러니 국회의원이 된 것은 유진산씨 덕분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철승씨와 더 가까웠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잘 알면서 유진산씨는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기는 듯했는데, 여기에는 그 나름의 사람관리 방식이 숨어 있었다.


내 경우에 성격적으로 남의 눈에 띄게 줄서는 일을 못하는 편이어서 계파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목요회’라고 하는 초선의원 모임 하나를 만들어서 활동했다. 목요회 회원은 12명이었다. 당의 쇄신을 목적으로 했으므로 당의 여러 가지 잘못을 고치자는 주장을 많이 했다. 당 총재에게 부정적인 내용을 종종 말씀드렸는데 이 활동과 관련해서 유진산씨는 꾸짖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해라, 좋은 얘기다. 그런데 오 박사가 하나 기억해야할 것은, 자네들이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되지가 않아. 예를 들어 박정희가 독재정치를 하는데 여기 참여해서 개혁해야지 그냥 뒤집어엎자고 하면 그 사람들이 당할 사람들이냐. 그러니까 괜히 나가서 뒤집어엎어라 하고 떠드는 사람들이 애국자가 아니다. 그리고 자네들, 여당이 마음에 안 든다고 국회에서 퇴장하는 거 다 봤어. 퇴장하는 것도 좋아. 그런데 퇴장하면 누구 좋은 일 하는 건지 알아? 장관들한테 꼬치꼬치 물어가면서 잘못한 거 고치라고 야단치는 게 골탕 먹이는 거야. 보기 싫다고 퇴장해버리고 ‘자네들 맘대로 해봐’ 하고 놔두는 게 그 사람들 애먹이는 거냐?”


그런 지적만 하곤 했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유진산씨 아니면 누구도 못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런 식으로 유진산 전 당수는 내가 선명하게 하느라고 떠들어도 섭섭해 하지 않으시고, ‘젊었을 때는 다 그렇게 하는 거’라는 식으로 인정해주었다. 지금도 그런 면은 존경스럽게 생각한다.


목요회 활동과 관련해 떠오르는 또 다른 사실은 소장파 초선 모임이라고 하지만 내막적으로는 대다수 인원이 이미 김대중씨나 김영삼씨, 또는 유진산씨와 깊이 연관돼 있어서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계파 수장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계파 수장들이 목요회에 사람을 끼워 넣고 보고하라고 시킨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실망만 많이 느꼈다. 요즘 국회를 보니 날치기에 참여하지 않겠다든가, 아니면 계파와 상관없이 오직 국민을 위해서 활동하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본다. 하지만 공천 주는 사람을 의식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변한 것이 없지 않을까? 

▲ 8대 국회의 개혁파 초선의원 모임인 '목요회' 회원들.     © 성남일보

유진산씨가 사람을 관리하는 방법 중에는 내 사람이 다른 계파 쪽에 끼어 있는 걸 은근히 좋아하는 점도 없지 않았다. 원내 부총무를 임명하는 과정이 그랬다. 그때 김영삼 계에서 아무개를, 김대중 계에서 아무개를 임명하는 과정에서 유진산씨가 나를 이철승계 부총무로 발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철승씨가 이에 대해 반발하면서 “오세응 보다 선배가 있는데 왜 오세응을 지명하느냐?”며 자신이 직접 선정하겠다고 나섰다. 이철승씨는 이때 남원 출신의 양해준 의원을 부총무에 포함시키려 했다. 양해준 의원은 나보다 나이도 많았고 이철승씨 밑에서 20~30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 대신 오세응을 부총무에 넣으면 자신의 조직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이 이철승씨의 판단이었다. 평소에 오세응이 자기 사람이라고 광고하고 다니면서 정작 그럴 때는 안 된다고 해서 나는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결국 유진산씨는 이철승씨 의견을 받아들여 양해준 의원을 부총무로 임명하면서 나를 외교담당 부총무라는 자리를 하나 더 만들어서 포함시켰다. 이철승씨도 좋아할 만한 대안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자신의 계파 숫자를 늘리는데 열중하기보다는 다른 사람 밑에 가 있더라도 내용적으로 자신하고 통하는 사람을 많이 두려고 한 것이다. 이것 또한 유진산씨만의 정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2) 진산과 함께 보낸 20시간


유진산 전 총재와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유 전 총재가 날 부르더니, “4월 18일부터 일주일간 나하고 여행을 좀 같이 가야겠어”라고 말씀하셨다. 누구의 말이라고 거절하겠는가? “예, 그러죠”라고 대답했는데, 내용인즉 자기가 하와이대학교 동서문제연구소에서 연설해야 하는데 통역을 해줘야겠다는 것이었다.

 

유 전 총재는 이어 “그런데 나하고 20시간쯤  함께 보내야겠어”라는 것이었다. 함께 20시간 정도를 같이 있어야 말하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를 잘 이해해서 통역할 수 있고, 그 역시 나를 통해서 연설내용에 대해 공부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오 박사도 바쁜 사람이지만 나도 바빠. 그러니 내가 내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같이 있자고 하면 중요한 약속이 있어도 깨고 나와 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전이건 오후건 유 전 총재가 원할 때마다 상도동 자택  마당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주제는 주로 연설 내용과 관련한 국제정세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나한테 물어보기도 하면서 정말로 20시간을 채운 다음 하와이대학교에 가서 통역했다. 술술 부드럽게 통역이 되어서 나도 깜짝 놀랐다. 유 전 총재가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할 지, 또 설령 앞뒤가 조금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지금 어떤 맥락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지 알았으므로 다른 것과 연결해서 통역하는 것이 가능했다.


알다시피 통역에는 직역(直譯)이 있고 의역(意譯)이 있다. 뜻을 이해하기에는 의역이 좋지만 맥락을 잘 이해하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모를 경우가 허다하다. 유 전 총재는 이 점을 고려해서 미리 시간을 갖자고 한 것이었다. 이런 배려는 자신의 연설 내용을 청중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통역하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려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일을 겪으면서 유 전 총재를 더 존경하게 되었다.


반면에 대조적인 경험을 한 적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신민당 총재 때의 일이다. 김 전 총재가 어느 날 부르더니 “오 의원, 나 일본 외신클럽에 가서 연설해야 하는데 통역을 좀 해줘야 되겠어”라고 요청했다. “예, 제가 해드려야죠”라고 대답을 했다.

 

문제는 출발할 때까지 발표 원고에 대해 일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비행기에 타니까 300부 가량 인쇄해 갖고 있던 10페이지 분량의 연설원고 한 부를 나에게 주는 것이었다. 연설 전에 중앙정보부 쪽에서 미리 알면 간섭할 것을 우려한 조치였던 셈이다.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일단 읽어보니 두 군데 정도는 고칠 필요가 있어 보였다. 1905년 미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가쓰라-태프트 조약에 대해 너무 강하게 비판한 부분과 문법상 고쳐야할 부분이 한 군데 있었다. “총재님, 이거 이거는 고쳐야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해당 부분 아래에 고친 내용을 써서 주었더니, “꼭 고쳐야 되겠나?” 하고 반문하셨다. “고쳐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다시 대답했다. 그날 저녁에 다함께 밤을 새워서라도 고쳐달라는 것이 김 전 총재의 요청이었지만, 나는 저녁에 외국기자들과 약속이 있어 그럴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나를 믿지 못하고 비밀리에 원고를 만든 것이 섭섭했던 것이다.


당시는 박한상, 이택돈, 한병채 등 자기 계파의 직계들이 여럿 동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파벌이 아닌 나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시 미리 줬다가 중앙정보부에라도 들어가 압력을 가하면 곤란하다는 걱정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데 내가 밤을 세워가면서까지 충성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때 내 기분이었다. 결국 그들이 밤새도록 고쳐야했는데, 돌이켜보면 당시 정치 환경이 야당 총재가 해외에 나가서 연설하는 내용까지 간섭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도 너무 과민반응을 보였던 게 아닌가 싶다.

 

(3) 내가 본 ‘진산 파동’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 전,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후의 일이다. 전국구 순번을 정하면서 유진산씨는 당수인 자신이 1번을 하고, 김대중 씨는 2번으로 했다. 김대중씨가 비록 대통령 후보였지만 나이도 열댓 살 아래이고, 당 총재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하려면 자기가 1번을 갖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우선 김대중씨가 몹시 불만을 가졌다. 자신이 그래도 신민당 대통령후보였으니 전국구 1번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 외무장관을 지낸 정일형 의원 댁에서.     © 성남일보

그 다음으로는 정일형 박사가 불만을 표출했다. 당에서는 당시 막사이사이 인권상을 받고 지명도가 높은 이태영 여사를 전국구에 넣기로 했었다. 당 지도부 내에서 부부에게 공천을 주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없지 않았다. 또 이 여사의 특별당비 납부에 대해 원칙론자인 정 박사가 돈을 내고 공천 받을 수는 없다고 하는 바람에 공천에서 배제된 것이 원인이었다. 그 결과 김대중 후보와 정 박사 지지자들이 상도동 유진산씨 집에 난입해서 집을 다 부셔버린 것이 ‘진산 파동’의 핵심이다.


김대중 씨 쪽에서 내걸었던 이유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사위가 되는 장덕진씨가 영등포에서 공화당 공천을 받아서 출마하는데, 당수가 출마해서 막을 생각을 해야지 왜 피하느냐는 것도 있었다. 또 유진산씨가 전국구 1번으로 가면서 영등포에 대신 공천한 사람이 너무 약한 젊은이라는 비판까지 더해지면서 유진산씨가 한때 피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진산 파동으로 유진산씨가 완전히 쫓겨나는 줄 알았는데, 이후에 전국구 1번으로 당수를 계속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라긴 했다. 이 무렵 비주류였지만 점잖은 인품으로 신망이 두텁던 김홍일씨가 당수 대행으로 총선을 치렀다.


또 다른 일화는 채문식씨가 총무국장으로 당의 도장을 갖고 있었다. 총무국장이 이 도장을 뺏기지 않으려고 숨겼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말 야만적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정치에 도장이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임금이 옥쇄를 찍어준 것이 증거가 된다면서 우리나라 법원에서 도장 찍는 것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모양인데, 판결하는데 도장을 누가 쥐고 있느냐가 기준이 되고, 그래서 강도가 들어올까 봐 그것을 보호하고 신경 쓰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유진산씨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몇 번 병석으로 찾아뵈었는데, 통증을 느끼면서도 진통제를 거절하신 일이 기억난다. 진통제를 안 맞고 참으면서 꾸부리고 앉아 계시곤 했다. 유진산씨가 돌아가실 때 나는 IPU 회의 때문에 외국에 있어 임종을 보지 못했다. 그게 못내 안타까워서 요즘도 아들이 지내는 제사에는 꼭 참석한다. 몇 년 전에는 모교인 보성고등학교에서 추모회가 있었고, 다음 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추모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4) 첫 상임위 활동, ‘한진 사태’로 얻은 유명세


내가 처음 국회에 들어갔을 때 원내총무는 김재광 의원이었다. 김 총무가 내게 배정해준 위원회는 보사위였다. 내가 그래도 미국에서 외교학박사를 했고, 미국에 아는 사람도 많은데 외무위로 갈 수 없냐고 했더니, 외무위원회는 아무나 가는 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초선뿐 아니라 전국구 의원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신이 외교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지금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보사위원이 되었다. 그때 ‘한진 사태’가 터졌다. 한진이 대한항공을 인수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도파백화점 바로 옆 한진빌딩에서 근로자들이 농성을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한진은 미국으로부터 월남전 보급 관련 일을 맡았다. 한진이 돈을 많이 벌면서 임금을 착취했다는 것이 근로자들의 주장이었다. 보사위가 노동청을 감독하고 있었으므로 신민당 차원에서 현장으로 조사를 나가게 되었다. 한국 사정도 아직 어둡고 내용도 잘 모르긴 했지만 현장에 나가보니 근로자들이 오세응 의원이 왔다고 특별히 농성장으로 들여보내줘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야당은 못 사는 사람과 근로자 편을 들어야 한다는 마음에 조금은 무모하게 농성 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근로자들과 대화하면서 “전부 부수지 말고 내가 한진과 이야기를 해볼 테니 대화를 하자.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달랬다. 그래서 농성 근로자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정부와 한진을 공격할 수 있었다.

 

특히 신민당에서 보사위와 내무위가 주축이 되어 한진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었을 때 내무위 소속 재선의 김수한 의원과 함께 나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 국회로 조중훈 사장과 조중건 부사장을 불렀다. 막판에는 구치소에 가있던 노조위원장도 국회에 출석시켜 경영진과 대면을 시켜가면서 진상규명 활동을 벌였다.


조사위원회 활동 중에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나는 조중훈 사장의 얼굴을 몰랐다. 그런 상태에서 조중훈이라는 사람이 국회에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젊어서 캐물었더니 동생 조중건 부사장으로 밝혀졌던 일이다.

 

신민당의 초선의원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무시하고 나왔는지 태도가 불손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한진 공화국의 대통령이 나오셨나? 국회에서 태도가 그게 뭐냐?”는 식으로 질타했는데, 그것이 언론보도를 타면서 내가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근로자들이 한진빌딩에 방화를 해서 큰 사건으로 번졌다. 그때 오치성 내무부장관은 건물이 봉쇄된 상황에서 내가 포위망을 넘나들면서 중재 역할을 하니까 “당신 미국에서 뭘 공부했는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이런 게 통하지 않아. 한국 공부 좀 더 해가지고 와서 한국 국회의원 해” 하면서 날 무시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흥분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 치명적인 지적을 했으며, 그것이 다시 언론에 보도되곤 했다. 당시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초선의 김윤덕 의원은 내가 한 말에 대해 누군가 토를 달면 옆에서 많이 도와주었다. 그렇게 보사위에서 3개월 있는 동안 언론에 내 이름이 많이 올랐고, 근로자들한테도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계속]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손 전화 : 010 - 5261 -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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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9/25 [10:56]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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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하신 이재선씨가 입바른 소리하면서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제목이 기소여부 초읽기가 뭡니까?? 김혜
역시 참언론 성남일보 예전부터 알고 기
혜경궁 김씨입니다. 저를 죽여주세요.. ^
혜경궁김씨입니다. 이재명지사가 감옥에가
박사모 부부가 똑같네.. 이제와서 딴소리
조중동이 성남일보와 같았다면, 지금 대한
인맥이 아주 화려하네~ 줄줄히 낙하산인사
이런 게 기사죠. 이재명이 뿌린 돈 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