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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계파 정치 하지 않으면 손해”
첫 번째 공천 탈락 ...1978년 신민당 전당대회,이철승씨와 중도통합론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자서전 - ⑮ 첫 번째 공천 탈락] 성남일보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 책임’을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책임’은 현실정치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4. 첫 번째 공천 탈락

 

(1) 1978년 신민당 전당대회,이철승씨와 중도통합론

 

내가 공천을 못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차 실장은 경호실 일에 전념하면서 여주 출신의 정동성 의원에게 지역구를 양보했다.10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로써 공화당의 정동성, 신민당의 유기준,무소속의 오세응 3명이 경합했다.

 

정동성 의원으로서는 참 어려운 선거였을 것이다. 나는 신민당과 공화당의 음모로 공천에서 탈락했다고 떠들면서 이철승,박정희의 이름을 거명하는 적극적인 선거운동으로 하늘을 찌르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공화당 후보는 제일 의지하던 통반장과 정부 산하기관들이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따라 신민당의 유기준 후보를 지원함에 따라 설 곳이 없는 묘한 일이 벌어졌다.중앙정보부 보고에 의하면 “상부지시에 의해 오세응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신민당 후보를 도울 때 정동성 후보가 강력히 반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전력을 다하여 박 대통령을 공격했는데 정동성 의원은 나에 대해 한 마디도 공격적인 용어를 쓰지 않고 참 점잖게 선거를 치렀다. 경희대학교 체육학과 출신으로 차지철 경호실장과 특별한 친분이 있음에도 중앙정보부가 자기를 도와주기는 커녕 오세응을 떨어뜨리기 위해 신민당 후보를 전적으로 지원하는 상황에서 존경스러울 정도로 참고 조용히 조직 관리하면서 선거를 치렀던 것이다.

 

그 결과 나와 정동성 의원이 당선되었다. 정 의원은 그 후 체육부장관으로 우리 축구팀을 이끌고 평양까지 간 바 있다. 같은 지역의 여야 의원이었지만 나에게는 “오 선배, 오 선배”하면서 깍듯이 예의를 지켜주었다. 그는 교육에도 열을 올려 여주에 대학교를 설립했는데 지금도 그 학교가 잘 운영된다고 들었다. 9대 때 차지철 의원,10대 때 정동성 의원과 함께 의정활동을 하면서 두 사람 다 충돌 없이 잘 지냈다. 손 아래인 두 의원이 이제는 모두 타계하여 안타까운 심정이다.

 

1978년 10대 총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세 사람이 전당대회에서 맞붙었다. 세 사람 모두 조직원을 전국에 파견해서 자기 사람을 최대한 많이 만들려고 야단이었다.

 

이 무렵 하루는 이철승씨가 나를 찾더니 경상북도로 내려가서 조직운동을 좀 해줘야겠다고 부탁했다. 이철승씨가 호남 출신이다 보니 경상도 쪽 조직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역시 경상도 지역에는 연고가 없었던 탓에 조금 의외의 부탁이었다. 그래서 경상북도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한진사건이나 김형욱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인기도 좋으니 그리 해달라며 간청하는 것이었다. 하도 애원하기에 일단 내려가서 조직 작업을 시작했다.

 

조직 작업이라고 해봐야 결국 대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지지를 호소하는 일이었다. 높은 낭떠러지에 험한 산길인 울진 어딘가로 새벽 2~3시에 찾아가서는 소주를 함께 마시면서 이철승 씨가 보내온 갈비세트나 상품권 등을 나눠주고, 이철승씨가 훌륭한 사람이니까 이번에 꼭 좀 찍어 달라고 부탁하고 다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식으로 새벽부터 곳곳을 누비면서 이철승씨 지지를 호소하는 운동을 했다. 어느 날 아침 여관에서 눈을 붙이고 일어나보니 조선일보 1면 톱에 이철승씨 기사가 올라 있었다. 내용은 이철승씨가 “개헌이 밥 주느냐 떡 주느냐, 되지도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 요란만 떤다”고 김대중, 김영삼 씨를 비난했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당시 신민당 대의원 90%가 유신헌법 폐지를 원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정권을 유지하려고 개헌하지 않고 유신체제를 이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야당 사람들은 다 개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김대중씨와 김영삼씨는 서로 경쟁적으로 빨리 개헌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뜬금없이 개헌이 되지도 않을 텐데 공연히 소란만 피운다고 했으니 표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기분이었다. 이철승씨는 당시 개헌을 아무리 떠들어봤자 되지도 않을 텐데 인기를 위해 떠드는 것보다는 될 것부터 투쟁하자는 입장이었다.

 

조선일보 기사를 보고 화가 나서 이철승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하는 말씀이 이랬다.

"아휴, 너 수고 많이 한다. 고맙다."
하지만 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짜고짜 따지고 나섰다.
“고마운 건 다 집어치고, 형님 이게 뭐요? 아니 지금 대의원들이 유신철폐 개헌하라고 하는데, 개헌이 밥 주느냐 떡 주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나가서 표를 얻으라고 그러십니까?”
"너는 아직 몰라서 그래. 개헌하자고 해봐야 되지도 않는 거 괜히 인기몰이 하느라고 떠드는데, 그럼 되겠냐?"

전화는 그렇게 끝났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이건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번 의원총회 자리에서 당수였던 이철승씨를 겨냥해서 이렇게 발언했다.

"이철승 당수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이 당수는 박정희 정권과 함께 무너지려는 야당 당수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 그때 정권을 인수하려는 야당 당수입니까?"

 

지금 돌이키면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나도 화가 나 있었다. 그때 이철승 당수의 표정을 지금도 기억하는데, 얼굴을 붉힌 채 조용히 앉아서 듣기만 했다. 이런 일로 해서 나에게 대한 감정이 나빠졌다. 그 때문에 10대 총선거 당시 내게 공천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내 짐작이다. 요즘도 당 대표의 권한이 상당하지만, 당시에는 당수가 공천권을 거의 100%를 행사했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당시 이철승씨 측근이 중앙정보부에 “오세응이 의총에서 박정희 정권 뒈질 때 같이 뒈질 것인지”하고 말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철승씨가 개헌투쟁 무용론을 들고 나온 데는 평상시 가지고 있던 철학이 배경이었다고 본다. 이철승씨는 정치에 경험이 많은 분으로 유신체제 하에서 군사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기는 어렵다고 판단해서 중도통합이라는 유화정책을 택했다.

 

장면 정부 때 자신의 한참 후배였던 김영삼씨와 김대중씨가 중도통합론에 반대하면서 적극적인 투쟁을 주장하고, 또 이것을 통해 국민의 지지세를 확산해가자 초조감에서 그랬으리라고 지금도 추정하고 있다. 자신은 정정법에 묶여서 망명생활을 하고 왔는데, 그동안 편하게 지낸 후배들이 강경투쟁으로 바람몰이를 하는 것에 대한 감정도 물론 작용했다고 본다.

 

이철승씨의 이런 상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때 국민 정서는 적극적인 투쟁을 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신민당이 적극적인 투쟁을 통해 단합해야 하는 국면이었다.

 

그래서 “나라가 어려울 때는 중도통합론이 가장 좋으나 지금 같은 실정에서는 야당 당수가 그런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건의를 여러 차례 했었다. 그런데 그 같은 나의 조언을 무시한 채 어느 날 갑자기 폭탄 터트리듯이 개헌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철승씨에게 실망을 느끼기 시작한 계기로 되기도 했다.

 

(2) 공천 탈락과 첫 번째 탈당

 

그렇게 공천에서 떨어지고 나자 나도 질세라 무소속 출마를 결행했고,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이철승 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여과 없이 터뜨렸다.

 

"개헌과 관련해서 내가 이철승 당수와 반대되는 의견을 냈다고 공천에서 탈락했는데, 내 말이 맞습니까, 아니면 이철승 사쿠라 말이 맞습니까? 야당이 잘 되려면 진짜 야당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더니 낙천을 시켰으니 당수에게 옳은 이야기를 하면 공천 안주는 것이 신민당입니까?”

 

이철승 씨가 일부러 공천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내 나름대로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특히 이철승 당수 측이 중앙정보부에 “박정희 뒈질 때, 같이 뒈질라고 그러냐?”고 전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악센트를 더 크게 넣곤 했다. 청중들은 그 부분에 열광했다. 반응이 얼마나 뜨거웠느냐 하면, 내가 연설을 끝내고 나오면 청중들이 따라 나오는 바람에 도로가 막힐 지경이었다. 어쩔 도리없이 나는 다시 도로변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여러분이 이렇게 하면 교통방해로 내가 구속될 테니까 제발 쫓아오지 마시라”고 호소를 하곤 했다. 솔직히 서운하고 억울한 심정이 앞서서 그렇게 맹공을 퍼부었는데, 예상외로 유권자들의 반응이 좋아서 오히려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 결과 압도적 표차로 무난하게 무소속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10대 총선거 당시 상황과 관련해서 낙선운동에 참여했던 최종선씨가 쓴 책 <산 자여 말하라>의 201페이지부터 206페이지 사이에 자세히 나와 있다.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0대 총선거 약 1개월 전에 저자는 중앙정보부 인천분실에서 근무했는데 위의 호출을 받고 가보니 내일부터 성남시에 가서 무소속 오세응 후보를 떨어뜨리고 신민당 유기준 후보를 당선시키는 공작을 명하면서 직원 3명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자금은 걱정 말고 얼마든지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선거에 공화당의 정동성 후보, 신민당의 유기준 후보, 그리고 무소속의 오세응 후보가 성남, 광주, 여주, 이천의 지역에서 2명을 당선시키는 선거였다.

지시받은 대로 다음날 부하 직원 3명을 데리고 성남으로 갔다.

 

성남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중앙정보부의 선거운동은 관변단체 즉, 시청, 경찰서, 새마을협의회, 통반장 조직 등이 있는데, 이들에게는 이미 공화당 정동성 후보가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러한 친 공화당 조직에 신민당 유 후보를 지지하라고 이야기하면 먹혀들까 하는 것이고, 차지철 경호실장의 분신 같은 정동성 후보가 기미를 채고 크게 반발했다.

 

둘째, 무소속의 오세응 후보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해 중앙정보부에서 돈을 얼마를 써도 자기들의 불법이 탄로 날 뿐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얼마든지 쓰라는 돈도 3,000만원밖에 못 썼고 결과는 중앙정보부가 후원한 유기준 후보는 떨어지고 오세응 후보와 정동성 후보가 당선됐다.”

 

최종선씨는 최종길 전 서울법대 교수의 친동생이다. 최종길 교수는 유신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가 사망했다. 당시 정보부는 최 교수가 자살했다고 발표했으나, 정보부 직원이었던 최종선씨는 절대 자살할 리 없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나는 유세장에서 “여러분! 이번에 절 찍어만 주시면 당장 신민당에 다시 들어가서 사쿠라들을 내쫒는 운동에 앞장서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래서 당선 직후 곧바로 신민당으로 찾아갔다. 마침 당 지도부 인사들이 다 모여서 당무회의를 한다고 했다. 방문을 박차고 들어갔더니 이철승 당수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오 의원 수고했다”면서 악수를 청하기도 하는 등 환대하는 분위기였다. 그 자리에서 “오래간만입니다. 저 당선해서 올라왔습니다. 오늘 입당원서 내겠습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런 상황에서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입당한 다음 나는 김영삼씨를 당수로 만드는 일에 적극 나섰고, 결국 그가 당수가 되었다.

 

나는 본래 계파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계파 정치를 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것이 너무 많다. 신경식 전 의원이 2008년에 발간한 책 <7부 능선엔 적이 없다>를 읽어보니 “오세응 의원 같은 거물도 6선 때 문공위원장을 처음 했는데 나는 운이 좋아서 재선 때 문공위원장을 했다”는 대목이 있었다.

 

6선이 될 때까지 위원장 감투 하나 받지 못한 이면에는 내가 계파 정치를 멀리한 것이 작용했다. 비록 유진산 씨의 도움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내 마음대로 정치를 했고, 이철승씨와도 가까웠지만 쓴 소리를 많이 하다 보니 측근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옳은 것 같아서 그 분을 지지했지만 그래도 감투를 배려해줄 만큼 가깝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6선이 된 다음에 비로소 나도 국회직을 맡아야겠다고 강하게 어필해 문공위원장, 외무위원장, 국회부의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3) 긴급조치 위반과 박정희 대통령 서거

 

1979년 나는 긴급조치로 기소됐다. 선거법과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는데, 기소 이유는 10대 총선 유세 중 일본 신문에 보도된 김대중씨 사건 경위와 긴급조치에 관한 발언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무소속으로 당선돼 다시 신민당에 들어와 김영삼 의원 총재 추대에 성공했고, 마침 김 총재의 외국여행에 수행원으로 출국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김포공항에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출국을 저지당했다. 화가 난 나는 그 길로 경희의료원에 입원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8일간 단식을 하고 나서 그래도 살아서 싸워야겠다는 결의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은 단식을 하는 것이 몸무게도 빼고 더 건강해진다는 한 의사의 귀띔도 있고 해서 야당에서는 간혹 단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 국회의원 선거법 및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된 의원은 나 이외에 이기택 부총재와 손주항 의원이 있었다. 이 문제는 당에서 논란이 되면서 왜 공화당 의원은 놔두고 신민당 의원만 걸고 넘어가느냐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었다. 2월 5일 기소된 이후 22일에 첫 공판이 열리는 식으로 재판이 초스피드로 진행되었다. 법관 기피신청을 하면 몇 달 정도는 끌 수 있다고 해서 재판 때마다 재판장 기피신청을 하면서 지연작전을 썼다. 이 재판은 판결이 선고되기 열흘 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막을 내렸다.

 

(4) 양김 단일화 서명운동과 양김과의 결별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서거 이후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는 서로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야단들이었다. 곤란하다고 판단한 나는 고등학교 후배로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정대철 의원과 상의했다. “선배들이 이렇게 데모나 하고 군인들 물러나가라고 경쟁적으로 열을 올리면 다시 군인들이 정치할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우리 양김씨를 통합하는 서명운동을 하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 내 제안이었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곧바로 신민당 소속 의원들을 대상으로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그때 신민당 의원이 모두 66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 거의 모두로부터 양김 단일화 촉구서명을 받았다. 다만 직계로 알려진 사람들, 예를 들어 김영삼 계의 황낙주 의원이나 김대중 계의 권노갑 의원 같은 경우에는 서명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서명한 사람들의 3분의 2는 이미 각 계파에 밀착돼 있었다. 이들은 “오세응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김대중 씨와 김영삼씨에게 보고한 것은 물론, 오히려 나에게 계파에 불리한 행동을 하지 말도록 압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그들 중에는 바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김영삼씨에 잘 보여 다음 번 공천을 받아야 하고, 전라도 사람들은 김대중씨 말을 안 들으면 공천을 못 받을 것이므로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으리라. 하여간 서명을 하고도 그 쪽에 가서는 당신에게 충성한다면서 보고하는 식이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형님들, 이번에 둘이 합치지 않고 계속해서 정국이 이렇게 불안하면 꼭 군인이 들어옵니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내 충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내가 잡아야한다”는 주장만 펴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이러다가 군인이 정치하면 나는 형님들 두 분 모두 다시 만나지 않을 겁니다”고까지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기회에 이철승 당수의 중도통합론에 극렬 반대하고, 그로 인해 공천조차 못 받은 것에 대한 나의 짧은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5·16혁명을 강하게 반대해 정치활동이 금지됐던 이철승씨는 10년 간 미국에서 야인생활을 했다. 그동안에 후배인 김대중씨와 김영삼씨는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1971년 전당대회 때 40대 기수 세 명의 경쟁에서 이철승 씨가 밀린 것도 10년간의 공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 후 양김과의 차별화 전략에서 중도통합론을 들고 나온 것을 지금은 이해한다. 또 중도통합론에 반대하다가 공천에서 탈락한 후 그분을 너무 심하게 비판한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단상 -

 

1972년 10월 유신 직후에 나는 체육관에 통일주체 대의원들을 모아놓고 대통령을 선거하는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극렬히 반대하다가 긴급조치 9호에 걸려서 구치소 경험도 했다. 그런데 그때를 돌이켜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그때는 극렬히 반대한 것을 옳다고 생각했고 자랑스럽게도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정치학회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 국민의 62%가량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나는 내가 긴급조치에 걸리면서 유신체제를 극렬히 반대한 것이 잘못한 것인지 갈등도 느끼면서 박 대통령이 경제발전을 이룩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최근 프레스센터에서 「박정희 대통령 통치에 관한 연구분석」을 제목으로 세미나가 있었다. 거기에서는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이 약속이나 한 듯이 박 전 대통령의 독재와 유신체제를 극렬 비난하는 것이었다. 또한 지난 4·19 추모 행사장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씨가 4·19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행위를 사과하고 앞으로의 좋은 관계를 바라면서 그 행사에 참석하려는데 주최 측에서 이인수 박사를 밀어붙이고 쫓아내는 사진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 역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 두 분이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본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어려운 시기에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박정희 대통령은 사심 없는 애국심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여 우리에게 경제적 기적을 만들어 주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열린 세계대학 총장회의에 다녀온 박우희 전 세종대 총장의 논평이 머리에 남는다. 중국 등 다른 나라가 갖고 있는 ‘공칠과삼(功七過三)’의 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 근대화에 가장 큰 공로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은 자기를 그렇게 무모하게 여러 번 해친 마오쩌둥(毛澤東)을 평가하면서 마오에게 3가지 잘못이 있었지만, 중국을 위해 7가지 공헌한 애국자라고 칭송했다.

 

우리는 4·19의 책임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5·16과 유신체제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 두 대통령이 잘한 것이 더 많음을 인정하고, 또한 과거의 잘못으로 싸움 대신 건설적인 걱정이 있어야 함을 깊이 느끼게 된다. [계속]

 

-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손 전화 : 010 - 5261 -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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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0/09 [22:50]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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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하신 이재선씨가 입바른 소리하면서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제목이 기소여부 초읽기가 뭡니까?? 김혜
역시 참언론 성남일보 예전부터 알고 기
혜경궁 김씨입니다. 저를 죽여주세요.. ^
혜경궁김씨입니다. 이재명지사가 감옥에가
박사모 부부가 똑같네.. 이제와서 딴소리
조중동이 성남일보와 같았다면, 지금 대한
인맥이 아주 화려하네~ 줄줄히 낙하산인사
이런 게 기사죠. 이재명이 뿌린 돈 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