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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도쿄 IPU총회와 북한 김영남 ⑱
북한 실세 김영남과 만남 ... 도쿄 IPU총회서 김정일을 만났다?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자서전 - ⑱ 납북한 대결의 장,IPU총회] 성남일보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 책임’을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


7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의 자서전 ‘잘못된 정치,49%는 국민의책임’은 현실정치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3. 1974년 도쿄 IPU 총회와 북한 김영남

 

(1) 남북한 대결의 장, IPU 총회


우리 국회가 회원으로 있던 국제 의회조직으로는 국제의원연맹(Inter-Parliamentary Union)과 아세아의원연맹(Asian Parliamentary Union)이 있었다. 나는 초선 때부터 신민당의 국제국장 자격으로 두 회의에 자주 참석했다.


국제연합(UN)이 세계 각국 행정부의 연합기구라면, 국제의원연맹(IPU)은 세계 각국 입법부의 연합기구라고 할 수 있다. 국제의원연맹의 설립 취지는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국회가 행정부 수반을 선출하는 것처럼, IPU 회원들이 세계의 중요 사항들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국회가 행정부를 감시하듯, IPU가 UN 같은 정치기구를 감시하고 선도한다는 내용이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IPU 회원국에서 행정부가 국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지만, IPU는 회원국의 제반사항들을 토론하고 또 여론을 이끄는 역할을 한 정도였다.

▲ 1974년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연설.     © 성남일보

그런데 국제의원연맹 내에서 모임이 열릴 때마다 다투는 2개의 큰 축이 있었다. 하나는 아랍권과 이스라엘 간의 다툼이었고, 또 다른 축은 남한과 북한 간의 갈등이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회의가 열릴 때면 언제나 표 대결을 해야 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냉전체제가 엄존했고 미국과 소련,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대립이 이어지던 당시에 인도를 주축으로 하는 비동맹국가의 지지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문제는 이들 국가 대부분이 아랍과 이스라엘 싸움에서 주로 아랍 편을 들었고, 남한과 북한 싸움에서는 주로 북한 편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비동맹국가들은 수적으로 절반을 넘었다. 그런지라 국제의원연맹 회의에 참석할 때는 정말 전쟁을 치르는 기분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1972년 상황은 더 어려웠다. 그해 10월 유신체제가 발동돼 국회해산, 계엄령 선포, 긴급조치 실행 등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등 분위기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공산주의와 화해를 주장하며 중국에 평화의 손을 내밀었다. 한국에서는 주한미군의 감축을 단행하는 등 정말로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호기를 맞아 북한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있던 경제력과 압도적인 군사력을 중심으로 비동맹 각국과 공조를 과시하면서 우리를 외교적으로 압박했다. 다른 한편에서 일본의 조총련을 앞세워 우리나라의 반정부 인사들을 포섭함으로써 적극적으로 한국 정부를 타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974년 가을, 일본 도쿄에서 국제의원연맹 총회가 열렸다. 북한이 이 회의를 좋은 기회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총련을 거점으로 총력전을 펴고 있는 상황이었다. 1년 전에는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씨를 납치해서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다가 미국의 개입으로 미수에 그친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까지 일어났으니, 북한으로서는 이처럼 좋은 기회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통상적으로 4~5명을 보내던 대표단 규모를 잔뜩 키웠다.


홍기문(洪起文)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김영남(金英男) 노동당 중앙위 국제국장과 이계백(李季白) 조총련 부의장이 부단장, 권희경(權熙京) 주 소련 북한 대사 등을 대표로 한 10여명의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던 것이다. 고문과 수행원 13명까지 합하면 총 27명에 이르는 역대 최대 규모였다.

 

우리 측은 그 해 보통 때와 같이 장기영 의원을 단장으로 국회사무처 직원까지 합쳐 모두 10여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다. 상황이 이랬으므로 10월 2일, 회의가 시작되는 날부터 우리 대표단은 잔뜩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또 한 차례 격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2) 도쿄 IPU 총회에서 김정일을 만났다?


1974년 10월 2일 드디어 도쿄 IPU 회의의 막이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 대표단은 첫날부터 우리의 쿠데타와 강압정치 같은 문제점을 들먹이면서 싸움을 걸어왔다. 참다못한 이범준(李範俊) 의원이 “민주주의, 인권을 그렇게 강조하는 북한에는 여러분들이 가슴에 붙이고 다니는 김일성 배지를 떼고 다니는 자유가 있느냐?”라고 응수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북한 대표들은 일제히 일어나 야유하면서 회의장을 소란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회의장에서는 물론 회의장 밖에서까지 남북 대표들 사이가 살벌해졌다. 이범준 의원은 혼자 다니기가 어려울 정도로 공포감을 느껴야 했다.


이처럼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파티가 열렸다. 그런데 붐비는 식장에서 북한 수행원 한 명이 슬그머니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다소 긴장하면서 이름표를 보니 ‘이종혁’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이 사람이 지금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바로 그 이종혁이었다. 이종혁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이름표를 보더니 “오세응 의원이시죠?”라고 말을 붙였다. 나도 그의 이름표를 보면서 “북한에서 오셨군요”라고 응답하면서 간단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 IPU 북한대표 이종혁이 내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면담을 제의하고 있다.     © 성남일보

그가 말을 이었다. “한반도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한데 우리가 잘 해야죠.” 나도 “우리가 싸우지 말아야죠. 같은 배달민족끼리 잘 좀 합시다”라고 대답하면서 분위기가 다소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대화를 이어가던 중 이종혁이 제안하기를 “오 선생님 같은 분하고는 대화가 되네요, 우리 김영남 부단장 한 번 만나보시죠. 참 좋은 분이에요“라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부(副)자가 붙는 사람이 대체로 노동당을 대표하는 실력자인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나도 흔쾌히 좋다고 그의 제의에 응했다.


솔직히 대답은 시원하게 해주었지만 정말로 만남이 이뤄질 줄은 몰랐다. 이종혁이 연이어 언제가 좋으냐고 물어오면서, 난 이들이 진심으로 날 만나길 원한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바에야 피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언제라도 좋다고 대답했고, 이종혁과 저녁 파티 후 8시에 데이코쿠(帝國)호텔 바깥 서북쪽 모퉁이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이종혁은 체격이 통통했다. 이날 이종혁과 만나는 장면을 통일신문 기자가 찍어서 보도하기를 “김정일이 위장을 해서 일본에 들어와 오 의원하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는 바람에 잠시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도 언론 보도를 보고 난 뒤에 의아하게 여겼는데, 외모가 비슷해서 생긴 에피소드였던 셈이다.

 

(3) 북한 실세 김영남과 만난 2시간


이종혁의 주선으로 북한의 실력자 김영남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하지만 정말 김영남을 만나도 되는 것인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도쿄는 바로 한 해 전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당시 국내법은 북한사람과 만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2년 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까지 만난 마당에 국회의원인 내가 김영남을 못 만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또한 그들이 나를 납치하더라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도 함께 했다.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문제가 대화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으로서, 그 순간 용기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심도 물론 했다.


그래도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나는 우리 대표단 일행으로 김종필 총리의 비서실장인 김진봉 의원에게 짧은 편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혈기왕성한 야당 의원이 이북 사람 만나고 다녔다고 트집잡힐 수도 있어, 국무총리 비서실장에게 알린 다음에 가면 나중에라도 욕먹을 일은 없을 것이란 기대에서였다. 그래서 “나 오늘 저녁 8시에 김영남과 만나는데 밤 11시까지 안 돌아오면 문제가 생긴 줄 아십시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김진봉 의원 방에 남기고 이종혁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그의 안내를 받아 데이코쿠호텔의 김영남 방으로 올라갔다. 


김영남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 “반갑습니다. 오 의원님!” 그는 부드럽고 친절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날의 만남은 2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다. 그 자리에 배석했던 이종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화는 주로 김영남의 질문에 내가 대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간간히 북한의 정세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전반적으로 김영남의 이야기는 야당 의원으로서 한국에서 핍박받는 것을 위로하면서 가깝게 지내자는 취지였다. 이런 기색을 눈치 챈 내가 그에게 던진 중요한 질문은 “남북통일을 하려면 김일성 동지와 박정희 대통령 생존 시에는 어려울 테니 그분들이 타계한 후에 계획을 잘 세워야 되지 않은가요?”하는 것이었다. 김일성 주석이나 박정희 대통령이나 지금 그 사람들보고 자리에서 비켜나라고 하는 식으로 통일이 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리고 지금 정책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 아니냐, 지금부터 분위기를 만들어서 김일성 주석과 박정희 대통령 다음 분들부터는 조금 부드럽게 전쟁 분위기를 해소해가면 우리 배달민족이 통일되지 않겠느냐, 청와대를 습격하고 그러는데 이제 그런 것은 그만둬야 하지 않느냐…. 나의 이런 이야기에 대해 김영남은 대뜸 “김일성 동지께서 언제 물러나고 하는 얘기까지는 관여하실 필요 없고요”라고 지적했다. 그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던 이종혁도 이 순간에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대화를 하면서 놀란 것은 김영남이 남한 사회는 물론 나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김영남은 나의 한진 노무자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오 의원께서는 참 용감하게 노무자들을 위해 애쓰셨죠?”라며 나를 칭찬했다. 김영남은 나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의 격돌사건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김형욱 씨는 정말 무서운 사람인데 그 후 보복은 당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그 사람이 미련했지, 공개 회의장에서 체면도 있는데 내가 어떻게 굴복했겠어요" 라고 대답해주었다. 김영남은 또 ”오 의원께서는 남한 정부가 북한의 함경도, 평안도 도지사를 없애야 한다고 발언했는데 참 옳은 말씀이죠"라며 내 국회 발언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면담시간이 거의 두 시간이 지나갈 무렵 이야기를 길게 해보아도 포섭은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그날 모임을 끝내려는 듯 김영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오 의원과 이야기를 해보니 많은 공통점이 있네요.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고 지냅시다. 우선 여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드릴 테니 도쿄에 오시면 이리로 연락을 해주세요.” 그가 내게 건넨 것은 북한 최고인민대회 위원(우리의 국회의원)이자 IPU 명단에 있는 이계백 조총련 부위원장의 전화번호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계백은 도쿄에 상주하면서 북한 최고인민대회 위원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IPU 총회에 참석한 소련 주재 북한대사도 최고위원이었다.


김영남과 면담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나는 김진봉 의원에게 무사히 돌아왔다고 알려줬다. 이후 중앙정보부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것 또한 나중에 안 일인데, 중앙정보부에서 내가 김영남과 만난 사실에 불만을 품고 총리 비서실장에게 연락했지만, 김진봉 의원은 고집불통 오세응 의원에게 책임을 추궁해서 뭘 하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 다시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던 나는 이계백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오세응 국회의원입니다.”
“아유 반갑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저는 지금 테이고쿠호텔에 있습니다.”
“한번 저녁이라도 모셔야겠는데요. 내일 시간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내일 저녁 5시에 연락을 드리죠.”
그렇게 통화를 끝냈는데, 약속된 시간에 전화가 왔다.
“제가 8층 25호실에 있습니다. 여기 와서 잠시 차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시게 이리로 오시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 방을 방문했고 한참 동안 한국 이야기를 비롯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일본에 오셨으니 제가 한 번 대접을 해야 하는데 남의 눈도 있으니 제가 내는 거라고 여기시고 친구들하고 술 한 잔 하십시오”하면서 봉투를 내놓았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어느 정도 예상하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절대 약점을 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거절했다.
“우리 한국 국회의원들은 돈이 넉넉합니다. 제가 저녁을 얻어먹은 것으로 하죠.”
그랬더니 재차 봉투를 내밀면서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도 다시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결국 거절했는데, 그로부터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고 나가려 할 때 다시 돈을 주려고 했다.

“이렇게 하시면 다음부터는 저를 못 만나십니다”라고 단호하게 거부의사를 밝혔다. 이계백은 나하고 이야기를 해보니 간단하게 포섭 당하지 않겠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포섭 계획을 연기했는지 그 날은 그렇게 끝났다. 북한쪽 사람들과 대화 채널을 유지하고는 싶었지만, 그렇다고 공작금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로 우리의 연락은 끊어졌다.[계속]

 

-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손 전화 : 010 - 5261 -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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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1/22 [15:49]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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