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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데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광주대단지사건에 대한 재평가는 시대의 흐름이다
 
모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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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만에 광주대단지사건의 전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전성천 박사.     © 성남일보

"벌써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군요. 모든 사람들이 다 잊어 버린줄 알았는데 성남지역단체들이 광주대단지사건을 재조명 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대단지사건(일명 8·10사건) 발생 30년을 앞두고 말 문을 연 전성천 박사(89).

전 박사는 성남교회 목사이자 사건 당시 구성된 광주대단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 고문을 맡았던 기독교계의 원로 목사로 더 잘 알려진 분이다.

지난 71년 8월 10일 발생한 광주대단지사건은 당시 언론에 의해 폭도들의 난동 등으로 보도돼 광주대단지사건의 성격 규명을 어렵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광주대단지사건의 성격규명 작업이 부진한 가운데 당시 사건의 핵심부에 있었던 전 박사를 만나 당시의 상황을 들어 보았다.

전 박사가 기자에게 내 놓은 첫번째 자료는 사건 당일 시내 일원에 뿌려 졌던 전단 한 장.
30년이 돼 색이 바랜 황색 종이에 "백원에 매수한 땅 만원에 폭리말라 살인적 불하가격 결사반대한다"는 내용이 담긴 광주대단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 명의의 직인 선명하게 찍혀 눈길을 끌었다.

광주대단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 명의의 유인물. © 성남일보



전 박사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청계천변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수천명씩 이주해 텐트촌에 2가족이 살 정도로 당시의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밝혔다.

▶ 광주대단지 사건 당시의 상황은.
▷ 당시 상황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청계천변에 살던 판차촌 사람들을 하루에 수천명씩 차에 싣고와 정비도 안된 언덕에 실어다 놓았고 기반시설은 텐트가 전부였다.

심지어 당시 상당수의 사람들은 하나의 텐트에서 2가족 이상이 살 정도로 주거환경은 열악했다.

내가 미국행을 포기하고 70년 9월 30일 성남에 들어와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주민들의 생활을 어려워 지기만 했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가지고 온 돈으로 생활을 했으나 몇달이 지나자 그 돈도 떨어지자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나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71년 5월 이후부터는 굶어 죽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생활이 더욱 악화됐다.

실제로 71년 5월경 인근 주민이 달려와 사람이 죽었다고 해 신도들과 함께 가보니 방에 죽은지 3일이나 된 시체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이것이 사람사는 세상인가 싶었다.
리어카에 실어 장례를 치루자 이후에는 이같은 일만 생기면 교회로 달려올 정도였다.

이같은 주민들의 비참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관계기관에 찾아 다니며 대책을 호소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으나 총리 자신도 힘이 없다면서 청와대가 아니면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청와대를 찾아가 호소를 하려고 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시민들의 힘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주대단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집회 날짜를 8월 10일로 잡았다.

▶ 집회 날짜를 8월 10일로 잡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 과거 공직생활과 야당생활 등을 하면서 형성된 정보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주민결의대회를 8월 10일로 잡은 것은 이날 미국 상원의원들이 한국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어서 당시 주민들의 처참한 생활을 알리는데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날짜를 그
렇게 잡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건이 그렇게 확산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당시 집회는 사전에 준비가 된 것인가.
▷ 그렇다. 데모는 청와대 등을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자 71년 5월경부터 은밀하게 준비를 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 위원장에는 성남교회 장로였던 박진하 장로가 맡았고 나는 목사라는 신분상 고문을 맡았으나 실질적인 일은 내가 주도했다고 봐야 한다. 목사의 신분으로 나서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 사건 당일 상황은.
▷ 8월 10일 아침에는 이슬비가 내리는 내렸다. 그러나 10시에 오기로 한 양택식 서울시장이 오지 않자 현장에 모인 6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양 시장이 속였다고 흥분하면서 관용차에 불을 지르는 등 통제가 안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집회를 주도한 사람으로서 사형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무기징역은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박정희 이름을 잘못써도 감옥에 가는 상황이었다.

오후 들어서도 주민들의 소요는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당시 중앙 부처에 근무하던 내 동생이 찾아와 정부에서 무슨 부탁이든지 들어 주겠다는 제안을 간접적으로 전해왔다.

그래서 관계자와 만나 5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첫째는 주민들의 생계를 위해 쌀 2만가마를 제공할 것, 둘째 현금 20억원 제공,셋째 도로 4차선 확장,넷째 공장 50개소 건립,다섯째 세금 5년간 면제 등 5개항이었다.

이 요구에 대해 정부는 무조건 들어 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이날 오후 7시경 이같은 사실은 마이크를 통해 알리자 데모가 순식간에 진정됐다.

당시 모인 주민이 6~7만명 이었으나 한 집에 한명은 나온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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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8/02 [06:58]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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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추악한 ~~ 진짜 이것이 민주국가
정말 많은 압박이 있으실텐데도...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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