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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괴테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기사입력 2017/08/11 [09:37]

여행자 괴테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입력 : 2017/08/11 [09:37]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 괴테는 200년 전 사람이다. 여행가로도 유명하다. 심금을 울린 소설을 남긴 것은 여행을 통하여 얻은 지식이다.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묘사,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대표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20대에 발표하였다. 불행하게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발표와 함께 금서가 되었다. 우리나라 군사정권 시절에 문학작품과 가요가 금서, 금지곡이 된 것과 비슷하다.

 

금서의 이유는 소설속의 주인공이 자살하는 장면. 당시 사회상으로 주인공이 정수리에 권총 자살은 파격이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소설이 발표되면서 베르베르 자살 유행이 일어났던 요인도 한몫했다. 그렇지만 괴테는 황제라는 작위를 받는 명예를 누린 작가로도 유명하다.

 

나폴레옹이 전쟁 중에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일곱 번이나 읽었다는 일화도 있다.

 

어느 날 나폴레옹과 괴테가 조우한다. 나폴레옹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자살 장면을 두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던진다. 괴테는 나폴레옹을 향하여 ‘장군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관심이 많은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라는 말로 뼈있는 대답을 한다.

 

괴테는 동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동양 방문에서 괴테는 단풍이 물든 은행나무에 매료 된다. 귀국길에 은행나무를 가져간다. 정원에 심는다. 사랑하는 애인 가시아 안네에게 선물도 한다. 괴테는 은행나무를 정원에 두고 단풍이 든 가을에 친지를 초청하여 파티 하는 것을 즐겼다. 독일은 물론 유럽 사람들은 은행나무에 환호를 지르고 매력에 빠진다.

 

괴테가 가지고 간 은행나무는 한국의 은행나무였다고 ‘방식’ 원예박사는 말한다.( 마음이 꽃이 되어 산다. 방식 저/마이스터하우스 ) 그렇다면 유럽으로 퍼져 나간 모든 은행나무의 어머니는 한국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유럽으로 여행한 은행나무의 동료들은 천년이 넘어서도 전국의 곳곳에 천연 보호수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시인이기도 한 괴테는 이탈리아를 한 달 정도 여행하며 이탈리아 여행기를 쓰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괴테의 여행기를 읽고 그가 간 코스로 여행을 하는 상당수 젊은이가 있다.

 

괴테는 여러 나라를 좋아했지만 프랑스를 좋아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에 대한 관심과 좋은 감정을 가졌다. 괴테는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비록 독일 사람이지만 좋은 나라에 대한 감정은 별도로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사람들이 가지는 감정과는 조금 다른 면이다. 어찌 보면 여행의 의미는 세계주의자라는 폭넓은 사고를 가지게 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이탈리아 기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살아가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여행지에서 괴테는 “다시 태어나게 하고 혁신 시키고 충실을 기할 수 있게” 했다고 적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연작시 ‘로마 엘리지’는 로마를 여행한 괴테의 감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제 고전의 땅에서 나는 기쁘고 영감에 차 있다.

 

옛날과 오늘의 세계가 더 큰 소리 더 큰 매력으로 말을 건넨다.” 괴테는 레겐스부르크, 뮌헨, 베로나, 베네치아, 피렌체 등을 거쳐 로마에 이르고 나폴리와 시칠리아로 넘어 간다. 여러곳을 누볐지만 목적지는 로마였다.

 

괴테는 1786년 12월 3일 로마에 도착한 날이 ‘나의 제2의 탄생한 날이자 진정한 삶이 시작된 날’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행은 괴테에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내면이 성숙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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