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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지도를 만들었다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기사입력 2017/08/24 [10:17]

여행이 지도를 만들었다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입력 : 2017/08/24 [10:17]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여행의 목적은 다양하다. 자연경관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보기 위하여 곳곳을 돌아다닌다. 김광수 사진작가는 구름을 화면에 담기 위하여 사막에 텐트를 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도 예외는 아니다. 일평생을 지도 하나만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곳곳을 여행하였다. 당시 그가 신은 짚신은 헤아릴 수 없다. 지금이야 질긴 구두, 등산화, 운동화가 여행길을 가볍게 한다.

 

김정호는 짚신만도 큰 짐이 되는 시절에 힘든 여행을 즐겼다.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과도 없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왜 산을 가느냐는 질문이 있다. ‘그곳에 산이 있어 오른다는 것’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지리학자기전에 여행가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


김정호는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 무렵에 태어났다. 무렵이라는 것은 탄생시기가 분명하지 않다. 그가 저세상으로 떠난 날만은 1866년이 분명하다. 언제 한양으로 이주한 경로는 없다. 한양에서 살았던 곳은 남대문밖 만리재가 유력하다.

 

지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이 나이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플라톤이 저서를 남기지 않았으나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은 크듯, 고산자 김정호도 자신에 대한 글은 남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을 과대 포장 하거나 잘못된 정치적 파행(跛行)을 선행으로 덮는 경우도 있다.

 

김정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서문이다.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다.

 

<동여지도>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유일한 글이다. 김정호의 사상은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지지로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 한다.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지지의 관계를 강조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독도 분쟁이 일고 있지만 김정호의 지도를 보면 독도가 우리의 땅이라는 것은 불문이다.


김정호에 관한 영화(2016)도 만들어 졌고 교과서에도 김정호의 지도에 관한 업적은 물론 많은 작가들이 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김정호가 한국의 산하를 수없이 오르지 않았다고 폄하한다. 애초에 국가의 단위의 지도를 개인이 오로지, 여행을 통하여 제작 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부정의 소리도 한다.


김정호에 대한 부정적 역사관은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폐쇄적인 인물로 인식시키고자 한 것으로 단정한다. 분명한 것은 김정호가 만든 지도가 오늘 날까지 손상되지 않고 전해지며 직접 여행을 통하여 발로 만든 지도라는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우리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당시 산수화를 그리는 화가나 문인들이 중국을 소재로 그리고 썼다. 하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후 비로소 우리 땅과 우리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우리 이야기, 우리의 그림, 우리 음악을 하기 시작했다.

 

황하와 장강에서 눈을 돌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들여다보고, 태산과 천산에 눈을 돌려 백두산과 지리산을 노래 한 것이다.

 

김정호는 ‘한국인은 한국인의 길을 알아야 한다’ 외치고 다녔다. 그가 조선을 누비고 다닌 기록은 28년여 세월이다. 여행을 통하여 실측 답사하여 조선의 지도 <청구도>를 완성했다. 그리고 보완을 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대동여지도가 완성되며 곧바로<대동지지>를 집필했다.


오늘날 여행으로 이름을 남긴 한비아가 ‘지도 밖으로 나가라‘ 한 것은 일찍이 김정호는 ’길은 희망이고 길은 자유다‘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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