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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이 미국으로 여행을 하였다면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여행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보았다. 그 뿐이 아니라 한사람의 태도는 세계의 역사를 뒤 바뀌게도 하였다.


히틀러는 비엔나 미술학교에 입학,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다. 비엔나에서 3번의 낙방을 하면서 그는 미술을 접고, 실업계중학교에 입학 하였다. 하고 싶은 미술을 전공하지 못한 탓으로 그만 학업에 실증을 느끼고 중퇴하고 만다. 히틀러 아버지는 세관원이었다. 아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충분 여건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공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옆길을 선택, 세계 역사를 뒤바뀌는 악역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 후 히틀러는 공산당에 입당을 하며 정치에 발을 딛는다. 언변에 능술(能術)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그의 연설에 매료되는 일이 많았다.


우리나라에도 히틀러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 있다.


종로의 북촌을 오르면 경성 제1고보 터인 정독도서관이 나온다. 서울역사사료관, 중등학교 발생지, 성삼문, 김옥균 집터도 마주치게 된다. 그 중에도 눈에 띄는 것은 경기중학교, 구 경성 제1고보라는 이름으로 1927년에 창립된 학교다. 이 학교에는 심훈, 한설야, 박헌영, 이효석이 다녔던 학교다. 물론 더 많은 인물들이 있기도 하다.


오늘의 주인공 박헌영이 바로 히틀러와 비교할만한 인물이다.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한 박헌영은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영어에 관심은 미국 유학을 꿈꾼 것이다.

 

당시 경기중학교를 재학한 이광종(83세)선생의 이야기를 빌리면 재학생 360명의 꿈은 미국 유학이었다. 마치 유학이 유행처럼 번졌고 졸업 후 200명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광종 선생도 50년대에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머물고 있다고 한다. 국내의 이곳저곳과 모교를 견학하고자 방문하였다.

 

지금도 당시의 유학생이 100며 명이 미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여행의 결과는 과학적 통계로 증명이 된다. 경기중고를 나온 인재들은 여행이라는 유학을 떠나면서 한국의 역사는 새롭게 쓰게 된다. 그들의 귀국은 한국을 움직이는 정치, 경제, 교육 기타 등의 인물이 된다.


다시 박헌영으로 한걸음 깊이 들어가 보자. 어느 학생보다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였으나 그의 꿈인 미국유학의 길은 펼쳐보지도 못했다. 이유는 가난이었다. 1921년에 박헌영은 허정숙의 소개로 주세죽 이라는 처자를 만나 열애에 빠진다.

 

박헌영의 머리에는 오로지 여행을 떠나는 것이 소원이었다. 영어를 잘 하였지만 유창하게 대화를 할 만한 광장을 만나지 못했다. 결국 박헌영은 미국을 가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손쉬운 중국을 거쳐서 1921년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로 여행을 떠난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의 운명을 바꿀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1921년 늦가을에 김단야, 임운근과 함께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는 기회를 만든다. 그 길은 공산당을 접하고 사회주의에 빠지는 첫걸음이 되었다.

 

박헌영은 사회주의에 젖어서 귀국, 감옥살이를 하는 등 민주주의와 점점 멀어지는 역사의 뒷면 사람이 된다. 1925년에는 국내의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여 공산당 핵심 분파인 화요회 중심이 된다.


만약 박헌영이 미국으로 유학여행을 하였다면 분명,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젊은이가 되었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한국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독립운동가인 문창학씨는 박헌영이 러시아 배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쳤다. 가난이 그를 미국이 아닌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의 배를 타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헌영을 위한 노래를 만들었다. 바로 우리가 즐겨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노래다. 쉽게 말하여 두만강 노래는 사회주의자 박헌영을 두고 만든 노래다.

 

당시에 그 같은 사실이 알려 졌다면 노래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불려 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김정구라는 불후의 가수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을 뒤흔든 사회주의자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김정구 뮤지션은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념적 대립이 심각한 요즘에 그 같은 사실이 알려 졌다면 어림없는 일들이다. 역사는 늘 이렇게 아이러니를 만든다.


우리는 박헌영을 통하여 여행은 한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박헌영의 여행은 한국의 역사를 바꾸었다. 그러한 역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여행은 나를 벗어나는 길이다.

 

지금 북한에는 박헌영의 후예들이 새로운 여행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여행이란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 그들이 선의 역사를 만들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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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22 [22:17]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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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봉식 18/05/24 [08:08] 수정 삭제  
  역사는 늘 아쉽군요. 박헌영이 미국에 여행유학을 갔다면 오늘 처럼 불행한 역사가 없을 수도 있었겠네요. 칼럼이 매우 신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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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감이네요. 강단이 보입니다. 경영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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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개는 잘 신경쓰고 있어. 쟤는 대놓
성남일보는 이재명 신문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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