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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최창일 칼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기사입력 2018/12/04 [17:38]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최창일 칼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입력 : 2018/12/04 [17:38]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서울에 살면 세 가지를 경험해야 한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외국인의 말이다.

 

‘첫째는 남산의 케이블카를 타보는 것. 둘째는 남산타워를 오르는 것. 세 번째는 효창공원의 김구기념관과 윤봉길 묘소를 견학 한다’


남산 케이블카에 오르면 서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다. 남산타워는 서울의 위용을 가깝게, 또는 아스라이 한눈에 들어온다. 효창공원 김구(1876~1949)선생, 윤봉길(1908~1932)의사의 묘소와 기념관을 견학하는 것은 한국의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과 한국국민의 민족성을 살핀다.


역사는 한 시대의 역사적 방향을 정한 결정적인 하루가 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주인공들의 행적이 머무는 효창공원을 말한다. 외국인이 윤봉길의 기록을 깊고, 의미 있게 학습한 사실과 호기심은 둘째다. 우선 한국인의 한사람으로 부끄럽다. C시인도 효창공원을 지난해에 둘러보았기 때문이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의 일왕(日王) 탄생일, 기념일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집결지에 윤봉길의 폭탄이 명중한다.


군부 최고 실세 시라카와가 사망하고 일본군 수뇌부가 현장에서 즉사하거나 중상을 입는다. 윤봉길은 어떻게 사방을 둘러싼 일본군을 따돌리고 의거에 성공 할 수 있었을까?


의문 속에 거사에 성공한 윤봉길의사는 일약 세계적인 인물로 부각되었으며, 우리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매헌 윤봉길은 한시(漢詩)를 잘 썼다. 시집이 사후(死後) 2003년에 간행되기도 했던 시인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3.1운동의 실패는 국민의 집단 우울증으로 나타났다. 그런 분위기는 낭만적인 문학에서 먼저 나타났다. 2백만 명이 참가했던 3.1운동은 우리민족의 독립정신을 전 세계에 알렸다. 중국은 크게 자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3.1운동은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며 잊혀진 운동이 되어갔다. 윤봉길나이 12세에 불과했지만 가슴에 울분은 커가기만 했다. 고민 끝에 윤봉길은 제국신민(帝國臣民)을 교육하던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한다.

 

일제하에 문화정치로 발간하게 된 동아일보와 ‘개벽’같은 문예지를 읽으며 한학을 학습한다. 사서삼경 같은 한학을 공부하며 한시를 쓰기도 했다. 1922년 그의 나이 15세에 배용순과 결혼하고, 독학으로 역사와 신문학을 탐구했다.


그는 결심을 한다. 민족을 위하여 사는 길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김구 선생을 도와야 한다. 1930년 12월 청도(靑島)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1931년 여름까지 낮에는 세탁소의 회계원으로, 야간에는 노동강습회에 나가 활동하며 지냈다. 1932년 봄, 윤봉길의사는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찾아뵙고 민족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이야기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수통과 도시락으로 위장 된 폭탄 2개를 김구 단장이 전달한다. 이때 윤의사는 자신의 시계와 김구 선생이 차고 있던 헌시계와 바꾸는 여유도 가진다(효창공원 비치). 남아 있던 의거 준비금을 전달한다. 김구 선생의 전송을 받으며 택시를 타고 홍커우공원 입구에 내려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은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으로 메고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은 오른손에 들고 홍커우공원 정문을 통과한다.


당시 상해는 침략일본군 1만 명, 각국 사절과 초청자 등을 합하면 약 2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참가한 행사임을 정확히 인지했다.


윤봉길의 폭탄은 노무라와 시게미쓰 앞에 명중하면서 폭발, 천지를 진동한다. 순간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윤봉길의사는 자폭용 도시락 폭탄의 안전핀을 뽑으려는 순간 일제군경의 제지를 받고 체포당한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도 배후를 발설하지 않았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15분경 윤봉길의사는 형장에서 의연함을 보이며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조국에게 빚을 남기고 떠났다.


윤봉길의사는 13년을 일본에 묻혀있었다. 1946년 7월 9일 백범 김구에 의하여 효창공원으로 이장이 되었다.


1949년 7월 5일 국민장을 치른 김구 선생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되어 효창공원은 민족의 성지같은 의미를 갖는다.


윤봉길 의사가 떠난 12월. 겨울, 하늘에 잠든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효창공원에 가면 알게 된다.


윤봉길의사의 여행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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