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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길 순례자는 침착함을 먼저 걷는다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기사입력 2019/02/13 [21:31]

산티아고 길 순례자는 침착함을 먼저 걷는다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입력 : 2019/02/13 [21:31]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삶은 곳 기운이다. 마치 기차가 달리듯 빠르게 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사물을 보며 천천히 가는 것이 삶이다.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매만질 수 없는 우주의 실체들의 모든 것이 삶속에 포함된다.

 

동양의 운명론과 정(靜)사상도 어쩌면 여기에 뿌리에 둔 것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연의 움직임과 사람의 행동이 이끌어나간다. 성경에 수많은 인물들은 삶의 선생이다. 어디 성경의 인물뿐이겠는가. 율곡이 그렇고 세종은 사상의 지배자들이다.

 

지배자라는 표현은 군사적인 표현으로 거부감으로 올수 있다. 어떻든 그들의 태도를 한마디로 함축하면 ‘침착함과 느슨함’으로 성공을 거둔 자들이다. 이러한 견해를 보이는 것에 이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가기위하여 광야 40년의 기록은 ‘침착과 느슨함’의 연단이다.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 라는 말이 국민성의 문화처럼 되어버렸다. 그것은 군사정권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또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부지런함이라고 본다. 결국 빨리빨리는 OECD국가 10위권에 들어가는 강국이 되기도 했다. 허지만 빨리빨리는 역기능을 만들기도 했다.

 

모든 것들을 빠르게 처리하지 않으면 마치 패배한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다. 그것은 부실공사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너무나 성급한 국민성은 세계 자살률 1위라는 아픈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성급한 강남의 어머니는 뱃속의 아이 때부터 예측 교육 상담을 한다고 한다.

 

최근 인기드라마가 있다. 대한민국 상위 0.1%가 모여 사는 ‘SKY 캐슬’ 안에서 남편은 왕으로, 제 자식은 천하제일 왕자와 공주로 키우고 싶은 명문가 출신 사모님들의 처절한 욕망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리얼 코믹 풍자극이다. 이 같은 교육의 저변은 인간이 가지는 침착과 느슨함과는 거리가 멀다. 순전히 물질과 욕망에 대한 탐욕을 드러낸다.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인간의 모순에 대하여 ‘침착과 느림의 철학’이 화두가 된다.

 

내가 가는 길은 내가 주인이다. 내 마음의 주인도 나다.

 

원효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도 바로 초극의 사상과 몸부림이 담겼다. 현대의 불안도 물신주의가 낳는 산물이다. 어디까지 가야 제길이 뚫리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내가 가는 길, 마음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주변의 분위기와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오직 나의 길은 스스로 선택을 한다.

 

인류의 역사는 늘 ‘서두름과 조급함’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과학적 분석에 의하면 내려가면서 보는 것, 올라가면서 보는 것이 다르다. 내려가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스치듯 간다. 올라가는 것은 주변을 천천히 살피게 된다. 그래서 일까. 언덕처럼 올라가는 장소의 상점이 매출이 더 크다는 통계가 나왔다.

 

이 같은 과학적 근거는 인간이 가지는 자연스러움의 느림의 철학을 담고 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신은 조급함이라는 일도 없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는 순간 인간은 조급함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천년의 해는 서두르지 않고 오늘도 창문을 두드린다. 천천히 발끝을 보며 걷는 자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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