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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노천명 시인을 푸른 터널로 내 몰았는가
 
최창일 /시인· 이미지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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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시인은 부조리한 삶에 괴로움을 내 뿜기보다는 흔히, 혼자서 삼켜버리는 삶의 버릇이 있다.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차디찬 2월이 서두르고 있었다. 미국의 유명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영국을 여행 중, 아침 호텔에서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한다. 실비아는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비명(悲鳴외롭고 두려운 상황)이 살고 있다”고 노래하곤 하였다.

 

실비아의 삶을 보면서 대한민국에 살아갔던 1930년대 이후의 시인들이 그려진다. 물론 어느 삶인들 덧없이 흩어지는 시간들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시인들은 비명을 밖으로 토하지 않는 서글픈 버릇이 있었다. 

 

오늘의 이야기 주인인 노천명 시인의 벼랑 끝의 모습도 그렇다.

 

라일락 향기는 누하동 골목을 휘몰고 있었다. 아직도 옛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서 그날을 이야기한다. 경북궁역 3번 출구를 벗어나 걷다보면 노천명 시인이 살았다는 누하동 집이 나온다. 

 

그런데 노천명의 집은 이름 모를 재력가가 매입 하였다. 매입자는 노천명이 살았던 집을  지워 버리고 새로운 한옥 집으로 신축 하였다. 국가는 노시인의 생가를 미래유산으로 검토하기도 했다. 허나 친일의 거센 문턱을 넘기에는 버거운 비명이었다.

 

노천명이 일제 강점기에 오점을 남기지 않았다면 분명, 시인의 집은 헐리지 않았다. 문화재청이, 아니면 문인들이라도 나서서 기념관으로 보존 되었을 것이다.  시인의 까만 그림자를 물리치고 내려온다. 불과 2천 미터 거리에는 이상(李箱) 시인의 집터가 보존 되어 있다. 서울시가 지원하고 관리 직원이 출퇴근하며 해설도 해준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문인들에게 가혹한 비명을 안겼다. 친일의 기록은 천형(天刑)으로 다가왔다. 분명 노천명에게도 일제 강점기의 오점이 없었다면 그의 시들은 찬란한 시의 문명사(文明史)로 조명 되었다.

 

불행은 1940년대 초 노천명이 일본을 여행하며 시작되었다는 비평가도 있다. 오랜 세월, 일제의 강점기였던 대한민국에 비하면 일본은 문명국인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노천명은 일본의 공원을 돌아보며 한가하게 노니는 사슴을 보며 사진을 남기기도 한다. 지식인들과 대화도 한다. 그러면서 노천명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 ‘사슴’이 발표된다. 

 

노천명에게 일본 여행이 준 이념과 조국관은 사뭇 뒤틀린 불행이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선배를 만나는 것은 미래를 만드는 시간표다.

 

노천명은 친일시를 14편을 발표했다. 물론 노천명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문인들이 일제의 대륙 침략 정책에 동조, 문학의 커다란 빙점(氷點)을 남긴다. 이른바 1939년 ‘황군위문단’ 일원으로 북지(北之. 중국의 북부지방)를 순회하고 돌아온 시인들도 그 중에 한 부분이다.

 

1942년 모윤숙, 최정희, 노천명 등 다른 여성작가들과 함께 우리문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조선문인협회‘에 가입하여 해방과 함께 그들은 큰 시련을 겪는 기록들이 있다. 그 중에도 노천명은 독특한 향기와 목소리를 지녔던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말로는 매우 비참하였다.

 

시인의 친일 기록은 너무나 선명했고 참회 보다, 구차한 변명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병상에서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노천명의 ‘사슴’은 백석시인을 두고 쓴 사라고 한다. 여러 자료는 그렇지 않다.

 

노천명은 독신으로 살았다. 보성전문학교 경제학을 강의한 김광진 교수와 연인 사이의 시간은 있었다. 김광진 교수가 본부인과 이혼 하고 결혼 할 것을 약속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김기림 시인이 노천명을 사모하여 눈 오는 날 토방까지 와서 발자국을 남기고 갔다.

 

노천명은 김기림시인의 고백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최정희 작가는 김기림 하면 시가 떠오르지 않고 눈 위의 발자국이 먼저 생각난다는 회상도 했다.

 

노천명시인의 ‘나의 20대’나 서문당에서 펴낸 『사슴과 고독의 대화』를 보면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로 회고와 고독에 침잠하는 ‘사슴’은 바로 노천명 자신으로 그린다.

 

당시 백석 시인이 많은 여류들의 선망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후일 성북동 길상사에 백석을 그리면서 평생을 홀로 살았던 김영한 여사를 보아도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노천명을 남자로 알기도 한다. 이름의 느낌이다. 노시인의 본명은 노기선이다. 여섯 살 즈음에 홍역으로 죽게 되었다. 가까스로 홍역에서 깨어나자 어머니는 노기선의 이름을 천명(天命)으로 개명하고 호적에 올렸다. 노천명의 얼굴은 살짝 곰보였다. 얼굴에 다소 콤플렉스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최정희 얼굴에 자신의 시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2002년 발표된 반민족행위 705인의 명단에도 들어가 있다. 노천명의 친일은 대한민국 역사의 비명(悲鳴)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국가가 노천명을 지키지 못한 불확실성의 시대의 산물일 수도 있다. 생의 슬픔 속으로 들어간 시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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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21 [06:54]  최종편집: ⓒ 성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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