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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는 살아있다

최창일 /시인· 이미지평론가 | 기사입력 2019/08/08 [08:42]

인어공주는 살아있다

최창일 /시인· 이미지평론가 | 입력 : 2019/08/08 [08:42]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바다의 계절, 여름이다. 바다를 유난하게 좋아한 작가가 있다. <인어공주>의 동화 작가 안데르센이다. 그가 태어난 곳도 바닷가였다. 작가는 간암으로 생을 마감하면서도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서 생을 마쳤다.

 

작가들에게 하나의 소망이 있다. 많은 독자와 교감하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보면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은 작가로서의 소망을 넘치게 이룬 사람이다. 

풀 내임을 빼고 친근하게 불러보자. 안데르센은 <미운오리세끼>, <성냥팔이 소녀>,<백조  왕자>, <눈의 여왕>,<벌거숭이 임금님>, <인어 공주>. 이 동화들은 아동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노소를 불문,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다.

 

한국 사람들은 <인어공주>나 <성냥팔이 소녀>는 한국인의 작품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많다. 그 만큼 한국의 어린이들이 좋아하고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냥팔이 소녀>는 인천의 피난 시절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6.25의 어려운 시절을 겪은 우리의 현실과 제목이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은 한국과 비슷하게 삼면이 바다인 북유럽 덴마크 오덴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덴마크 수도인 코펜하겐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코펜하겐은 세계적인 살기 좋은 도시 10위권을 매년 차지하는 교육도시다. 코펜하겐은 선사시대의 유적도 많은 미술사적으로 유명세를 떨친다. 종합청사의 도시, 세종시는 코펜하겐 시와 협약 하고 코펜하겐을 모델로 시를 가꾸고 있다.

 

 사람들은 살기 좋은 3대 도시를 선택하라고 하면 뉴욕, 파리, 오스트리아 빈을 든다. 서울도 148개국에서 25위로 평가되는 것을 보면 꽤나 좋은 도시다. 

 

안데르센이 만년에 살았던 집을 보면 그가 작품에서 <인어 공주>와 같은 바다를 소재로 한 동화를 쓴 이유를 알게 된다.  창문은 통 유리문이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전경이다.  뷰 좋은 집이다. 저녁이면 돌아오는 배들의 불빛과 인사를 나눈다. 안데르센은 날마다 같은 전경의 바다를, 날마다 다르게 보았다고 한다. 안데르센은 모두가 잠든 새벽, 인어공주를 만났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안데르센을 보면 알게 된다. 안데르센이 처음부터 뷰가 좋은 집에서 살지 않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처럼 지하의 초라한 방에서 생활했다. 

 

하층의 삶은 작품의 실마리가 되었다. 안데르센이 오덴세에서 코펜하겐으로 나온 시대는 매우 불안정한 사회 상황이었다. 안데르센은 선천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코펜하겐에 오자 곧바로 예술의 전당과 같은 곳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물론 쉽게 들어간 알바도 아니었다. 

 

안데르센의 주변에는 엘리자베스 제리샤-바우만 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의 그림에는 안데르센이 자주 등장한다. 1843년에 출간된 <천사>를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장면도 있다. 안데르센은 자신이 만든 동화를 주변의 어린이들에 자주 들려주던 기록이다.

 

천재들은 늘 변하고 발전 한다. 동화의 천재 안데르센은 왕립발레단 극장에서 비록 알바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왕립극장의 단장과 가까운 예술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안데르센의 부인은 왕립극장의 단장이 중매를 서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며 가족 간에 자주 만나며 열린 음악회와 파티를 열기도 했다.

 

19세기 초에는 타바코(담배)를 피우며 토론하는 일명 ‘타바코 파티’가 유행 했다. 당시의 그림들을 보면 젊은이들이 담배를 입에 물고 토론 하며 파티 하는 모습이 나온다. 안데르센은 당시의 젊은이와 예술인들이 즐겼던 타파코를 피우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동화 작가가 담배를 피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이다.

 

안데르센의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은 사진 자료들이다. 안데르센은 롤리드라는 친구의 별장에서도 아이들에게 둘러 앉아 동화책을 읽어주는 모습이 눈에 띈다.

 

안데르센의 명작인 <성냥팔이 소녀>는 처음부터 동화책으로 나오지 않았다. 덴마크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요한 토마스 룬드바(1818-1848)는 달력에 넣을 삽화를 <성냥팔이 소녀>를 그렸다. 달력의 편집자는 이 그림을 보고 안데르센에게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써 달라고 요청하여 <성냥팔이 소녀>가 탄생하게 되었다.  안데르센에게는 삽화가 먼저였던 유일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당시 어린이가 구걸을 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변칙적으로 성냥팔이 로 생계를 이어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아이들을 거지라고 생각하였다.

 

한편에서는 <성냥팔이 소녀>들에게 돈 주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보고 주라는 여론도 있었다. 안데르센은 소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써 독자들이 성냥 파는 소녀를 새롭게 인식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안데르센의 꿈은 배우였다.

 

안데르센은 지구에서 유일하게 인어 공주를 본 사람이다. 안데르센이 니하운 18번지 서재에서 운명하는 날, 코펜하겐의 어린이와 인어공주는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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