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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부제는 썩어도 그들은 썩지 않는다

최창일 / 시인· 이미지평론가 | 기사입력 2020/12/25 [21:38]

방부제는 썩어도 그들은 썩지 않는다

최창일 / 시인· 이미지평론가 | 입력 : 2020/12/25 [21:38]

[최창일 칼럼] 75억 인구는 지문이 다르듯 철학적 사고도 각각이다. 같은 것이라면 이념과 종교는 집단적이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가 지닌 것들도 거기에 속한다. 

이과생과 문과생의 사고의 차이도 다르다. ‘눈이 녹으면’ 명제에서도 이과생은 ‘물이다’. 문과생은 ‘봄이 산 넘어 오고 있다’. 라는 답이다. 음악을 하는 예술가가 들으면 뭐라 할까. 그들은 ‘눈이 녹으면‘라는 명제에 멜로디에 화성(발상. 창법), 리듬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 흘러가버리는 나만의 음악을 듣거나 멜로디를 창작할 것이다. 문과생과 이과생이 물질 너머를 집중한다면 예술가들은 사물의 흐름, 움직임을 잡으려 노력 할 것이다.

 

정치인과 학자의 사고는 더 다르다. 우리는 늦은 나이에 학문을 시작한 공자를 학자의 으뜸으로 생각한다. 공자는 매우 겸손한 인물이다. 자신이 성인임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제자들에게도 절대 숭배의 대상을 경계하였다. 위정(爲政)편 20장은 자부심담긴 자기 평가가 아니라 반대로 회한이 담긴 인생회고로 읽어야 한다. 

 

“나이 열다섯에 공부에 뜻을 뒀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이 서른에 어떤 인생의 방향성이 뚜렷해졌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이 마흔에 유혹에 이길 수 있는 인간이 됐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이 쉰에 천명을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이 예순에 귀가 순해졌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자신의 어제를 돌아보는 후회의 겸손을 주머니에 넣는 삶을 살았다.

 

정치인은 어떨까. 

 

“아는 게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말로 정치인의 자질이 충분하다”(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1865~1950). “정치인은 어느 나라에서건 똑 같다. 그들은 강도 없는 곳에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약속한다”.(니키다 흐르시초프, Nikita Khrushchev, 1894~1971)는 각각 명언을 남겼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며 시를 쓰는 최승호(1954~)시인은 ‘방부제가 썩는 나라‘의 시집에서 “모든 것이 다 썩어도 뻔뻔한 얼굴은 썩지 않는다”고 했다. 정치인을 두고 쓴 시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짐작을 한다.

 

최 시인은 이명박근혜, 이 역겹고 후안무치한 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다. 19대 대선 승리를 맞이하고 행복에 겨워 뛰어 다녔다. 이제 모든 것이 수월하게 변화할 날들만 기다렸다. 안일한 공상에 겨웠다. 뭔가 이상하다. 대통령이 변한다고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절망을 해서는 안 된다. 사회가 답답할수록 더욱 목소리를 내고 진보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답답함을 해소 한다고 말한다.

 

씨름에서 기술을 건다고 한다. 이만기 천하장사 씨름을 보면서 씨름 기술에 우리는 좋아했다. 그런데 기술은 씨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법에도 기술이 있었다. 그 기술의 사용은 특수층의 검사들에게 사용되는 것이었다. 2300명의 검사는 그 기술, 만유(萬有)를 그들 조직만의 보약으로 처방하고 건달처럼 살아간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Al Capone. 1899~1947)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할까.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으면 조폭도 당당해진다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

 

“‘좋은 뉴스’는 뉴스가 아니며 ‘나쁜 뉴스’” (1920년대 <타임>을 창간해 언론제국을 세운 헨리루스, Henry R. Luce. 1898~1967)라는 정의를 내렸다. 이 정의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인의 내면화한 가치가 되었다. 

 

언론은 규칙보다는 예외를, 규범보다는 일탈을, 질서보다는 무질서를, 조화보다는 불협화음을 보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오고 있다. 

▲ 최창일 / 시인     ©성남일보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래도 우리를 비추는 북극성이 있다. 빛으로 가야한다. 더 이상은 어둠으로 향하면 안 된다.

 

잠들지 못하는 유령을 살아있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한다. 절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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