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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보다 더 소중한 것

윤희완 / 자원봉사TV 편집인 | 기사입력 2022/02/28 [18:08]

황금보다 더 소중한 것

윤희완 / 자원봉사TV 편집인 | 입력 : 2022/02/28 [18:08]

[감사의 편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탐험대가 유적을 조사하다가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토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토굴에서 탐험대가 발견한 것은 끝도 없이 싸여 있는 황금과 두 사람의 유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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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대장은 이 사람들이 황금을 써보지도 못하고 모으기만 하고 왜 죽었는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조사를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추론했습니다. 황금을 캐기 위해 이곳에 온 두 사람은 오래된 토굴에서 금을 발견했고, 한동안 금을 캐며 토굴에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금을 모으는 데만 정신이 팔렸고, 앞으로 먹을 식량도, 다가오는 겨울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 윤희완 감사의 편지 편집인.     ©성남일보

‘이 정도면 됐다.’라고 생각할 때는 이미 겨울의 한 복판에 와 있었고, 식량도 모두 떨어진 채 땔감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보라가 몰아치며 쌓인 눈이 토굴을 막아버렸고, 이들은 갇힌 채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일 것입니다.

 

두 사람은 평생을 쓰고도 남을 황금을 발견했지만, 자신들의 죽음을 생각하거나 절제의 자세를 잊어버리고 욕심만 부리다 보니 이들에게 황금보다 목숨이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황금에만 신경을 쓸 뿐 황금이 생명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중요한 세 가지 금이 있는데, 그 세 가지 금이란? “황금, 소금, 지금”이라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 ‘황금’은 그저 돌덩이에 불과하고, ‘소금’은 언제든 황금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고 탄생과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합니다.

 

죽음이 다가오기 전 삶이라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황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지금 찾아서 절제와 채움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뭣에 쓸 것인가요? 어느 사람은 돈을 모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마늘 밭에 묻어놓았다가 엉뚱한 사람이 발견하여 그 많은 돈을 자기 것이라 말도 못하고 엉뚱한 사람이 갖게 되어 세상에서는 마늘밭의 돈 이라는 화제 거리가 되고 말았던 일과 집이 수 십 채 또는 수 백 채 집을 소유하여 보유세에 걱정으로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있다는 뉴스도 잊지 않습니까?

 

아무리 집이 커도 잠자는데 필요한 공간은 한 평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큰집이나 누가 더 많은 집을 소유하는 가라는 경쟁을 벌리고 있는가 하면 집이 없어 살기위해 새로 짖고 있는 아파트 분양을 하는 사무소에 분양 받으려고 신청을 하는 사람보다도 불법으로 분양을 받고자하는 사람들에게 분양이 되는 사례가 휭휭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남의 이름을 빌리거나 불법을 해서라도 한 채라도 더 소유를 하려고 하는 모리 배들 때문에 아파트를 많이 짖고 있으나 집이 없어 무주택자들이 많아지고 아파트 값은 나날이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래를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진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돈보다 중요한 것이 식구라는 단어를 중요시 여길 수 있고, 가슴을 따뜻하게 적시는 우리의 단어 중에 식구라는 말 그대로 못 먹고 못 쓰면서도 한 가족이라는 따뜻한 그 단어가 그립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가정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은, 한 집에 살아도 한 상에서 밥을 먹지 않거나, 가족 간에 잠도 같이 자지 않으며 각자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풍조가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식구’라는 말을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또는 가족이란? 한 솥밥을 먹는 식사 공동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자기 아내나 자식을 소개할 때, ‘우리 식구’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각 가정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식구’가 얼굴 맞대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밥상머리뿐인데 오늘날, 우리들의 가정에서 온 ‘식구’가 한 밥상에서 같이 식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요?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의 출근시간, 자식의 등교시간이 다르다 보니, 각자 일어나자마자 허둥지둥,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또는 우유 한 잔 서서 마시고 나가기 일쑤고, 저녁 귀가 시간도 각자 달라 저녁 식사를 한 식탁에서 하기는커녕, 언제 귀가했는지 서로 모르고 각자 방에서 잠자기 바쁩니다.

 

이러한 일상의 연속이니 ‘밥상머리 교육이나 대화’할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몇 일간 얼굴 못 볼 때도 허다합니다.

 

옛날에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늦게 귀가하는 ‘식구’를 위해, 아랫목이나 장롱의 이불속에 밥주발을 묻어 두곤 했습니다. 밥의 따뜻한 온도는 곧 사랑의 온도이기도 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어머니는 따끈한 국과 따뜻한 밥을 챙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전기밭솥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 라면 등 몸에 좋지 않은 인스턴트 제품이 집집마다 있어 필요할 때면, 밤중이라도 각자 알아서 처리하게끔, 너무도 친절하게 배려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가장들은 밤늦게 들어와 아내에게 “밥을 안 먹었으니 밥상 좀 차려 주시오.”하면 “아니 이 시간까지 밥도 못 얻어먹고 어딜 돌아다니다 이제 들어와서 밥 달라고, 부엌에 라면 있으니 끓여 먹든지 말든지 하시오”라고 합니다.

 

 물론 주부들도 상당수 나름대로 직장과 할 일을 갖고 있으니, 이해할 수가 있다 해도 현실의 가정은 너무 메마른 것 같습니다.

 

누군가 말했던가요. 오늘날 아버지는 “울고 싶어도 울 곳이 없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라고 했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버지는 직업 형편 상 귀가하는 시간이 대체로 늦습니다.

 

그래서 ‘식구’들이 가장을 기다리다가 먼저 잠자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다, 아이들이 깨어 있더라도 컴퓨터나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려 제방에서 건성으로 인사만 건넵니다.

 

한 집에 살지만, 잠만 집에서 자는 동거인에 불과해진 오늘날 우리들에 현실이 서글플 따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생가라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부모가 살고 있는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태어나고, 돌잔치, 생일잔치 모두다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갖습니다.  그러다가 회갑, 칠순잔치도 집 밖에서 하며, 죽을 때도 병원에서 죽습니다. 이러고 보니 ‘생가’가 없어졌습니다.

 

조상과 부모의 체취가 어려 있고, 나의 첫 울음소리를 내 품었던 집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어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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