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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중, 유일하게 시집을 펴낸 시인 연산군

최창일 / 시인· 이미지평론가 | 기사입력 2024/12/23 [07:22]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시집을 펴낸 시인 연산군

최창일 / 시인· 이미지평론가 | 입력 : 2024/12/23 [07:22]

▲ 사진 / 픽사베이  

[최창일 칼럼]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까.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시집을 낸 왕은 연산군(1476~1506)이다. 연산군이 낸 시집의 제목은 <시인 연산군>이다. 시인 연산군이 묻힌 곳은 방학동 산77이다. 

 

이곳에서 100여 미터에는 시인 김수영의 문학관이 있다. 김수영 시인은 시인이 뽑은 지성인이다. 연산군이 김수영 시인의 문학관과 가까운 곳에 묻혔다는 것은 운명론일 수 있다. 연산군이 방학동에 묻힌 것은 그 또한 우여곡절이 있다. 지금이야 서울시에서 묘지를 가꾸어 놓았지만 몇 년 전만 하여도 가시덤불로 오를 수 없는 가파른 언덕이었다. 연산군이 많은 시를 만들었으나 중종반정에 많은 시가 불에 타고 말았다. 반정(反正)의 뜻은 한문의 뜻이 말하듯 바르게 잡는다는 뜻이다. 요즘의 탄핵(彈劾)과도 같은 의미로 보면 옳겠다. 여하간 다시 연산군의 시로 옮겨간다. 천만다행인 것은 <연산군일기>에 125편이 등재되어 있다. 

 

시집은 도서출판 선에서 2000년 출판되었다. 역사 드라마의 신기로 알려진 신봉승 시인이 펴낸 것이다. 지금은 절판이 되어서 국립도서관이나 국회의 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시집이 되었다. 시의 주제는 정치적인 내용은 없다. 연산군의 시는 감수성이 풍부하며 개인의 내면적 고뇌와 자연에 대한 관찰을 담고 있다. 

 

연산군은 폭정 정치의 대명사라지만 시의 결은 다른 면을 보인다. (최동호 평론가) 그러한 그가 순수성이 짙은 시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해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외국인이 가장 선호하고 만 원권에도 소개되는 경회루 연회를 가장 선호했다는 연산군이다. 경회루에서 수많은 연회를 베풀어 흥청망청 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시는 시인의 문의(文義)다. 마음에 시의 마을을 지니기에, 마음(사유)에서 노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상소를 귀찮아하는 임금과 그 상소를 올리는 신하들 사이에 불편함은 조선 왕들의 실상이다. 상소에 관한 대립은 연산군에게는 심했던 같다. 연산군 일기에는 대신들의 직언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연산군의 시에는 자신의 주위에 아첨하는 무리가 가득했다는 연산군의 사연도 있다. 자신에게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도 시에는 반사적으로 들어 있다. 그런 지경이라면 자연 신하들은 임금의 동반(同伴)이나 구원이 아니라 각기 자기 살길을 갔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 정치와 너무나 흡사한 장면이 겹친다는 정치평론가의 말이기도 하다. 거듭 이어가는 정치평론가는 조선조에는 절대군주의 시대다. 사대부와 선비들의 기질이 임금의 기를 꺾어 놓는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어느 임금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다 하지 못했다. 

 

태종(太宗)과 같은 폭군에 버금가는 임금도 뜻을 모두 이루지 못한 것이 조선의 정치다. 이렇게 비유하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 뜻을 이룬 왕은 조선의 왕 중에 연산군이 유일하다. 그것이 위대하지 않다는 뜻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정치 용어로 반정(反正)이라는 뜻이 말하듯 아무리 폭군이라도 다시 민주주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이를 모르고 정치를 하는 것은 탄핵, 彈劾의 대상이 된다.

 

‘기침은 심하고 근심은 많으니/ 지친 마음 그치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며/ 밤새 잠을 못이루네./간들은/ 종묘사직 중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소장이란 소장마다/ 경연에만 나오라네.’

연산의 시에는 상소를 귀찮아하는 마음과 상소를 울리는 신하와의 사이에 불편함이 들어 있다. 연산군은 신하의 직언을 싫어했다. 각료가 2분을 말하면 58분을 말한다는 용산의 대통령과 겹친다. 시에는 연산군의 번민이 가득하다. 경연에 나가지 않는 게으름을 종사에 대한 걱정으로 메꾸려는 연산군의 인간적인 번민의 시다. 술을 늦게까지 마시고 출근을 가짜로 한다는 대통령의 소문과 겹치는 통치술이다. (오마이 뉴스)

 

‘들국화는 시들었는데/ 집국화는 난만하고/ 붉은 매화는 떨어지자/ 흰 매화 한창이네./ 풍물을 구경하며/ 하늘 이치 안다지만/ 인군의 도는 먼저/화목한 정사를 하는 것이리.’

▲ 최창일 시인     ©성남일보

연산군 6년인 1503년 10월 14일에 쓴 시다. 연산군은 화목 정사가 인군의 도임을 깨닫고 있다. 들국화나 묽은 매화와 집 국화와 흰 매화는 무오사화에 희생된 무수한 인재들을 마음속이라도 기리려던 뜻이 담긴 것이 아닌가 싶다. 인군의 도를 화목한 정사에 있음이 그 단서다.

 

연산군이 패륜에 들어선 것은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사사(賜死)를 알게 된 1504년 3월이다. 조정은 폐비 윤 씨의 사사를 감추고자 했으나 연산군이 알게 되므로, 연산군에게 절규(폐정)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연산군은 정치를 국민에 두지 않고 어머니의 죽음에 정사를 둠으로 생긴 불행이다. 

 

조선조에 왕 중 유일하게 시집을 낸 시인 연산군이다. 눈길이 녹으면 ‘시인 연산군’의 묘를 찾길 발끝은 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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