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권 칼럼] 올해로 106주년을 맞은 3.1절 행사는 서울 중구 숭의여자대학교 강당에서 독립유공자 유족과 정,관계 인사, 주한 외교단, 사회 각계대표, 시민, 학생 등 1천2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최상목 대통령권한대행 주재로 특별한 이베트(event) 없이 조촐하게 거행됐다.
숭의여자대학교에서 왜 3.1절 행사를 가졌을까? 일제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절하고 학교폐쇄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숭의여대 모태는 숭의여학교로 평양에서 1903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 모팻 박사가 기독교 선교 여자 인재양성 목적으로 설립해 운영하다가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항의하며 제일 먼저 학교를 자체 폐교했다.
광복 후 서울로 이전해 여자중,고교를 운영하다가 2012년 여자대학으로 승격해 오늘날 3,000여 명의 재학생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5대 국경일이 있다. 3.1절(3월 1일), 제헌절(7월 17일), 광복절(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 한글날(10월 9일) 등이다. 가정에도 기념일이 있듯이 국가에도 기념일과 한 차원 높은 국경일이 있다.
필자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절 국경일을 처음 접한 곳은 7살 때 인삼의 고장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지푸내로 나의 태(胎)를 묻은 곳이다.
그곳은 금산군에서도 벽지 중에 벽지로 보석사 절 밑에 30여 가구가 북향을 향해 기와집 한 채 없는 그야말로 더없는 가난한 시골이었다.
해방되는 그날 소를 잡아 잔치하고 꽹과리, 징, 북을 치며 골목을 누비며 남녀노소 모두 나와 너울너울 춤을 춘 추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 오른다.
그곳에는 임진왜란(1592년) 때 활약한 승병장 영규대사의 큰 공적비가 있고 일제가 그 비석을 땅에 묻었다. 그런데 해방되고 그 이튿날 저녁 금산 시내에서 횃불을 대낮처럼 밝게 하고 트럭을 타고온 사람들이 타고 와 눈물을 흘리며 파내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감격의 눈물이 나온다.
국경일은 국가의 경사스러운 날로 국회에서 법률로 정하고 바쁜 일손을 잠시 멈추고 하루를 쉬며 의미를 새기는 날이다.
뜻 깊은 그날을 국민 모두 그의 의미와 그의 정신 계승발전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한다. 중앙정부는 사람들을 모아 기념식을 성대하게 열어 그날의 정신을 새롭게 다진다.
지금 우리의 세태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른이신 지도자들의 도리에 어긋나는 몰상식 행위들로 인해 급기야 국가 존망 위기로 국민들은 삶의 목적의식이 상실되고 국가의 최고의 경사잔칫날 국경일을 무의미하게 지내는 현실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우리 아파트 마을은 1200가구로 3월 1일 늦은 아침 운동 삼아 한 바퀴 돌면서 태극기 게양한 집은 몇 가구에 그쳤다. 참으로 선열들에게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는 1910년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총독부를 설치해 식민 통치를 강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해 일본사람으로 동화시키려 했다. 이에 항의 독립을 선언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였던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 독립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날로 그 의미는 크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로 종교 인사주축으로 개신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 등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을 촉발시켰다.
1919년 3월 1일 이들은 종로 태화관에서 조선은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총독부 정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 선언을 알렸다.
3,1운동은 각계각층 202만 명이 참여해 비폭력 만세운동으로 수개월 진행되었다. 시위횟수 1,542회 일본 경찰의 총탄으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체포자 46,948명 불에 탄 민가 715호 교회 47소 학교 2개소에 이른다.
3.1 독립운동하면 약방에 감초처럼 결코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유관순 열사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동문들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3.1운동에 동참했다. 고향 천안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18세 나이로 순국할 때까지 서대문 옥중에서도 계속 만세를 불러 모진 고문으로 순국했다.
번지 점프로 유명한 분당 율동공원에는 3.1운동 기념공원이 있다. 성남지역 3.1만세운동은 대왕, 낙생, 돌마. 남한산성에서 1919년 3월 26일 송파지역에서 27일 28일 29일 연속적으로 치열하게 일어났다.
3월 27일 돌마면 분당 장날에 시작해 대왕면 지역으로 확대되어 3일간 3,000여 명 참여 일경에 항거해 만세운동 전개했다. 지도자는 한백봉 열사(당시 33)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옥살이를 했고 신간회 간부로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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